글쓰기 모임 책으로 <아무튼> 시리즈가 선정되었다. 정확한 미션은 <아무튼> 시리즈 중 나만의 원픽을 고르는 건데, 읽은 책이 몇 권 안 되기 때문에 시리즈 중 내키는 책을 한 권 골라 읽었다.
생각보다 <아무튼> 시리즈가 많아서 놀랐다. 술, 서핑, 여름, 노래, 할머니, 산, 뜨개, 문구, 양말, 계속, 방콕 등등 무수히 많은 ‘아무튼’ 중에 고른 것은 <아무튼, 술>이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데다가 가끔 마시던 술도 시험관을 계기로 끊어버렸다. 관심 없는 주제를 고른 것은 순전히 김혼비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에는 고단함 속에도 유머가 스며있다.
첫 번째 글인 ‘첫술’부터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름 모범생이었던 작가는 수능 백일주를 마시고는 한껏 취해서 자신을 배추로, 배추에서 김치로 둔갑시킨다. 다들 술주정으로 넘기는 와중에 진지하게 따져 드는 친구와 싸움을 하게 되는데.. 실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웃기다. 그렇게 시작된 술꾼으로서의 이야기가 유쾌하면서도 진하게 펼쳐진다.
가장 인상 깊은 에피소드는 ‘술 마시고 힘을 낸다는 것’이다. 지어낼 수도 없을 것 같은 엉뚱한 행동에 깔깔거리다가 이내 씁쓸해졌다가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작가에게는 인생의 암흑기라고 부를 만한 시절,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우울증’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던 때. 간을 빼놓고 온 토끼처럼 우울함만 쏙 빼놓고 술자리에 임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들도 그녀의 힘듦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는 게 어른다운 방식이라고 여기며 열심히 술을 마셔줬고 마냥 놀아줬단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오락실까지 들러 오락가락해진 정신을 붙들고 택시를 탔다. 앞자리에 앉은 그녀는 기사님 옆에서 둥근 노래방 리모컨을 붙들고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노래방 리모컨과 택시에 두고 내린 그녀의 지갑을 택시 기사님이 노래방에 맡겼다는 알게 되어 감사의 문자를 보냈는데, “네, 힘내세요.”라는 답변을 받는다. 그러고는 친구와 통화를 하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다.
분명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신나게 웃고 있었는데, 나도 함께 취한 것처럼 정신없이 빠져들어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시큰해진 콧잔등에 정신을 차렸다. 김혼비 작가의 글은 웃음으로 시작해서 뭉근한 감동을 주는 매력이 있다. 그저 웃긴 에피소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깨달은 삶의 지혜를 함께 건네준다. 마음 놓고 웃다가 감동받게 되는 흐름이 참 좋다.
20대까지 나는 매우 진지한 사람이었다. 사소한 농담도 할 줄 몰랐다. 삶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태생이 좀 진지한 편인 것 같다.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지나며 삶에는 유머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나는 늘 진지했고, 긴장했다. 어떻게 하면 이 내용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아이들 머리에 중요한 내용을 콕콕 심어줄까, 라는 고민으로 가득했다. 첫해에는 나조차도 내 수업이 재미없었다. 딱딱한 말투와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전해주겠다는 꽉 막힌 태도는 지금의 내가 봐도 답답하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에 물들어갔다. 나도 아이들도 긴장하지 않는,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수업도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하겠다는 욕심에 힘을 빼고 유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웃음과 유머, 농담만 한 것이 없다는 것도. 그리고 지금은 다행히도 소소한 농담을 즐기는, 웃음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긴장을 풀고 마음껏 웃게 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그녀의 글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정신없이 웃다가 삶의 쓴맛에 울다가 또다시 웃게 된다. 마치 술을 마신 것처럼 나를 내려놓고 된다. 웃고 감동받고, 나와 비슷한 마음을 만나 위로받게 되는 글. 같이 술자리를 한 듯한 생생한 글에 술 생각이 날 법도 한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는 내내 술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책은 끝났지만 김혼비 작가의 술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친구들과 진한 술자리를 하고 있겠지. 책을 한 권 쓸 만큼 술을 사랑하는 그녀처럼, 나도 진하게 사랑하는 게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