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행성] 매일이 기념일

3월 14일-오늘의삶쓰기

by 유이지유

오늘 뭘 할까 고민하다가 좋아하는 땅콩 얘기를 해야겠구나 싶었는데,

날짜를 보니 뭔가 익숙했다.

가물가물하여 검색을 했더니(검색까지 할 정도 별 대단치도 않은) 화이트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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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초가 유럽인 밸런타인데이에 비해, 일본 사탕 업자들의 상술로 탄생한 기념일.

꼭 연인에게가 아니더라도 4월에 신학기가 시작되는 일본에서는

'의리 용' '은혜 갚기 용' 등의 관계 유지에 활용되는 날.

업자들은 재고 땡처리해서 좋은,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날.

선물은 신중히,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걸 선물해서 은혜를 갚자는 의미로,

화이트데이니까 '화이트'를 선물해서 '갑분싸'

관계고 뭐고 매장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날. ^6^;;


밸런타인데이건 화이트데이건 별 대단할 것도 없는 날이지만,

한때 나에게도 '베리 인폴턴트데이'였던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했었으나...

아~세월 무상.


*

문득 하루키의 글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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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인데 초콜릿을 받기는커녕, 무말랭이 두부조림을 하는 자신의 신세를 푸념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여학생 세 명이 앞다투던 대상에서,

이제는 제 손으로 농가의 아주머니에서 50엔(천 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파는 무말랭이와 두부를 지져 "밸런타인데이요? 흥!" 하는 아내에게 해 받치는 처지가 되었다.


"2월 14일 저녁때 무말랭이 반찬을 만들었다.
세이유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농가의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비닐봉지에 담긴 무말랭이를 팔고 있길래,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산 것이다. 한 봉지에 50엔이다.
그리고 나서 근처의 두부 가게에서 두껍게 지진 두부와 맨두부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서 무말랭이를 한 시간쯤 물에 불렸다가,
참기름으로 볶고, 거기에 여덟 조각으로 자른 지짐 두부를 넣고,
육수와 간장, 설탕과 조미용 술로 맛을 내어 중간 불에서 졸였다.

그동안 카세트테이프로 B.B.킹의 노래를 들으면서 당근과 무채 초무침,
무와 유부를 넣은 된장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부를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도루묵을 구웠다.
이것이 그날의 저녁 반찬이었다."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중


푸념스럽게 늘어놓고 있어도 이런 게 쿨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시대도 달라지고 워낙 특이한 시절을 겪는 중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돈이 없어서 선물하고 싶어도 선물할 수 없는 처지이거나,

"학원비도 없는데 사탕 같은 소리하고 있네."


돈은 있어서 선물할 상대가 없어서 선물할 수 없는 처지이거나,

"연애질?! 팔자 좋다. 죽어라 스펙 쌓아도 모자랄 판에!"


돈도 있고 선물할 대상도 있어서 챙기고 싶은데... 원.

"친구 본 게 언제인지... 얼굴도 가물해요."

(시절이 어떻고 저떻고 해도 기념일 챙길 사람들이야 무슨 수로도 챙기겠지만.)



"으휴~, 한심한 것들이나 상술에 놀아나 저런 돈을 쓰지…뭔 달이면 달마다 기념일이냐!"

재작년까지만 해도 마트 앞에 즐비한 초콜릿이나 사탕을 보면 자동 발사되는 멘트이었더랬다.

(작년에는 기념일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생각할 여력도 없어서 패스.)

돌아보면 이런 말이라도 내뱉을 수 있던 시절이 얼마나 좋았던가 싶어 진다.



(TMI )

아침부터 속사정이 안 좋은 나는 청국장과 계란을 먹었다.

디저트로는 홍차와 계피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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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을 거의 매일 먹고 있으니, 거의 매일이 화이트데이, 매일이 기념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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