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가을 혹은 억새라고 말하면...
시골집 마당에 내려 앉은 오후 햇살이 눈부시다. 돌담 아래 노란 국화꽃이 소슬 바람에 흔들린다. 신원사 아랫동네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올 봄에 말이 나왔던 아파트 리모델링이 한 여름 무더위를 피해 10월에 마침내 시작되었다. 기왕 하는 김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적당한 소형차를 생각하며 들어갔다가, 어어어~ 하는 사이 중형차 계약을 하고 나오듯이 리모델링 공사도 그렇게 일이 커졌다. 그리하여 살림을 접어 창고에 보관하고, 이곳 계룡산 신원사 아래 시골집으로 임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이 벌써 두어주 전이다. 남편과 고양이 2마리. 그나마 남편은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다보니, 냥이들을 돌보고, 나를 위한 최소한의 먹거리만 장만하면 되는 나날이다.
산골 마을의 가을날은 그저 적막하다. 해 좋은 날에는 마당가에 앉아 멍때리고, 궂은 날에는 안방 창문으로 내다뵈는 삼불봉을 생각없이 바라보며 하루를 산다. 해가 기울면 사위는 갑작스레 깜깜해져, 한 것없는 하루를 일찌감치 마감한다. 바람이 잠잠한 밤이면 작은 모닥불을 피운다. 그런 밤에, 인간은 불 앞에 앉아 불멍이라는 것을 하고, 냥이들은 거실 유리창에 매달려 어둠 속에 춤추는 모닥불을 내다본다.
삼십여년을 일하는 인간이었다가 노는 인간, 정확히는 이제 놀아도 좋은 인간이 마침내 되었다. 그 많은 경험을 쌓고 나면, 그러니까 이 나이가 되고 나면, 이 세상을 제법 잘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일이 어떻게 굴러 가는지, 나는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확신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놀아도 좋은 나이에 이르고 보니, 세상은 여전히 모호하고, 내딛는 걸음은 자주 멈칫대곤 한다. 세상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빨리 내달리니,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내 인생 공부가 겉핧기로 내달려온 것일까...
오늘 시골집 마당에 앉아 있다가, 문득 세상을 향해 길게 뽑아올린 안테나를 이제는 접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향한 안테나를 통해 수집한 단어들이 박제된 상태로 내 머리 속에 나의 세상, 나의 길을 만들었다. 그저 머리로 배웠거나, 세상의 흐름을 쫒아 모아둔 그 단어장을 뒤적이며 맵핑하는 것을 그만 두고, 실체로서의 단어들을 모으는 것, 그것이 아마도 놀아도 좋은 나이에 새롭게 하는 나의 단어 공부일 것이다. 새롭게 수집하는 단어들이 맥락없이 흩어져 있더라도 실망할 일은 아니다. 굳이 효율과 의미를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 노는 사람의 특권 아니겠는가!
집 뒷마당에 기와를 얹은 낡은 돌담이 둘러쳐있다. 그 돌담에 기대어 듬성 듬성 한갓지게 자라난 억새들이 멀리 계룡산 삼불봉을 배경으로 바람에 흔들리며 가을을 나고 있다. 창밖의 억새들을 내다 보며 무심코 생각한다. 앞으로 살면서, 누군가 가을 혹은 억새라고 하면, 이 곳에서 보낸 가을날들과 저 창밖의 흔들리는 갈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요 몇일, 이른 아침에 뒷창의 커튼을 젖히면 젖은 몸으로 봄품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어... 아 억새는 이제 끝났구나 싶어진다. 그러나 어느새 아침 햇살을 받아 소슬하게 말라, 바람에 흔들리며 다시 반짝인다. 아직도 시골집 억새의 가을은 한창이다.
아름다운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