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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Feb 23. 2024

느슨한 퇴사_프롤로그

밤에 퇴사해서 아침에 입사하는 이야기


프롤로그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 상현역에서 신분당선을 타고 신사역까지 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40분 정도.


나는 맨 앞 칸에서 기다렸다가 타서는 전동차 머리 쪽 첫 량에서 서서 간다. 출근 지하철은 언제나 붐비지만 두 정거장 더 가 신논현역에 정차하면 출근객의 무리가 순식간에 밀어닥친다. 내가 타는 이 전동차는 도심의 메인, 판교, 강남으로 향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오래 지하철을 타다 보니 전동차에 타는 이들의 착장만 봐도 이들이 판교에서 내릴지, 강남에서 내릴지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판교 쪽에서 내리는 분들은 백팩을 아주 많이 메고, 어딘가 범생이 스멜이 난다. 강남 쪽은 어딘가 언밸런스하지만 꽤나 유행을 따른 느낌의 소품을 하나씩 들고 다닌다. 신사동은? 생각보다 어르신들이 많이 여기서 내린다. 암튼 상현역에서 지하철을 탈 때, 나는 발을 딱 붙이고 허리를 기대고 있으면 인파가 들이닥쳐도 밀리지 않은 채 갈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안쪽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쓴다. 출근객의 한 덩어리가 되어 그렇게 꼬박 40분간 갇혀 있어야 한다.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만원 지하철 풍경이다.


출근 40분, 퇴근 40분. 1시간 20분 동안 나는 대개 라디오 영어 방송을 청취하거나 인스타그램을 검색하거나 책을 보지만, 피로가 밀려오면 그냥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컨디션이 좋으면 몽상을 한다.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이 미치는 대로 떠오르는 다양한 상념들. 때로 나를 지치게 하고, 때로 나를 부추긴다. 이 생활에서 벗어나면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해야지... 그러다 복병이 나타났다!

얼마 전부터 나와 비슷한 시간대에 출근하는 중년의 남자가 내가 기대어 선 자세에 얼굴을 마주하고 서 있다. 여느 때처럼 내가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젖어 있다가 눈을 떴는데, 헉 내 얼굴 바로 앞에 그자가 얼굴을 디밀고 서 있었다. 황급히 자세를 옆으로 돌렸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지? 그러기를 여러 번. 이제 허리를 편안히 기대고 눈을 감고 출근하긴 글렀다.


어느 날 출근길도 여느 때처럼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무표정하게 대부분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거나 누군가와 채팅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쇼핑을 하거나.

덜컹이는 전동차 소리뿐, 침묵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눈동자들.  나와 비슷하게 매일 출퇴근하며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 속내를 알 수 없지만 겉으로는 참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자. 그자가 너무 부담스럽다. 오늘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든 또 나타나겠지. 허리를 기대지 않고 내리 40분간 서서 지하철을 타면 통증이 나타난다. 숨이 막힌다. 불안해진다. 멀미. 그리고 미약한 현기증.


어찌하면 이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


지난해는 약을 먹지 않고 지내 수 있었다. 그런데 연말부터 무기력과 불안 증상이 서서히 올라오더니, 괜찮아졌나 싶다가 다시 미약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하철에서, 일터에서, 집에서 공황이. 공황이 어디선가 느릿하게 타오르는 장작 냄새처럼 스물스물 일어나고 있다. 이럴 때 선택지가 몇 있다. 병원에 다시 가서 약 처방을 받는다, 회사를 그만둔다, 이사를 간다. 이 중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은 무얼까.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그에 따른 파장도 비교적 적은 것.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맞은편 지하철을 타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더는 저자와 얼굴을 마주 보며 출근하고 싶지 않다. 다시 마주치면 이렇게 외치고 싶다. '아저씨, 돌아서세요!' 그렇게 말한들 내 삶에 뭐가 달라지겠나. 문득,


'흙'을 생각했다.

만지고 싶다, 밟고 싶다, 뭘 심고 싶다.


공황이 올 때 흙을 생각했다.


공황.


흙.


공황에 흙.


안되겠다. 퇴사해야지.

자주 종종 어느 땐 매일 퇴사를 생각한다.

이럴바엔 퇴사를 해야겠다. 

하지만 이성이 내게 말해 주는 건 언제나 이거다. not today.


그래서 결심했다.

이제부터 평일에 매일 퇴사를 해야지. 그러고서 출근할 때 입사해야지. 나만의 느슨한 퇴사 생활을 해 나가야지. 내가 뭘 좋아했더라. 뭐가 보고 싶고 뭐가 하고 싶더라. 뭘 기록하고 싶고 뭘 남기고 싶더라.


이 이야기들은 밤에 퇴사해서

아침에 다시 입사하는 그 시간,

내게 떠오르는, 일어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관한 기록이다.

이른바 자동퇴사법으로 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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