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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n Mar 08. 2020

살아서 퇴근하는 법

사지 멀쩡히 집에 돌아가자 

오늘도 살아 돌아와 대문 초인종을 누른다.


울퉁불퉁 출근길을 걸어갈 때만 해도 과연 오늘 두발 성하게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으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숨이 붙은 체로 무사히 귀환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하루의 일과지만, 평균 이하의 능력을 가진 자들에겐 하루하루가 호두껍질 마냥 주름지고 고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매일을 보내고 있을지 모르는 무리와 함께 공감하고자, 십수 년에 걸쳐 터득한 살아서 퇴근하는 법을 읊어본다.


1. 상사의 질문에는 무조건 '네네네' 한다.


"1분기 실적 분석 준비 잘되고 있죠?"

"네. 관련부서에 데이터 요청해 놨습니다."

안 해놨다. 사실 분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지금 생각났다.

일단 '네'라고 던지고 나와서 부리나케 관련부서 가장 낮은 직급을 검색하여 '죄송하지만 자료 좀' 구걸한다.


"지난번에 수치 다시 확인하라고 했는데 그대로네요?"

"네. 수정했는데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놓은 것 같습니다. 본 자료에는 수정해 놨습니다. 다시 드리겠습니다."

수정 안 했다. 사실 그런 말 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숨도 쉬지 말고 수치를 바꿔서 다른 이름으로 저장한 후 재발송한다. 파일명에 날짜는 물론 오늘 이전 시점으로 적는다.

2. 상사가 내게 화낼 때는 내가 더 자책한다.


"아니 지시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보고를 안 하죠?"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요새 집안 일도 있고 해서 그런지 정신을 못 차립니다. 많이 지치고 힘이 빠집니다."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는 말투로 상사의 편에 서서 나를 꾸짖고 나무란다. 내 미간을 심하게 짜부라질수록 상사 미간은 조금씩 풀려간다.


"일을 하자는 겁니까 말자는 겁니까?"

"저에게 너무 화가 납니다. 분명 열정은 그대로인데 실망만 안겨드리는 것 같습니다."

천장을 두어 번 힐끗대며 분노를 참는 듯한 주먹을 쥐었다가 피면 상사는 당황하며 시선을 피한다. 그럴 때 재빨리 목례하고 주먹을 쥔 채 내 자리로 돌아가면 된다.

3.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세상 제일 기뻐한다.


"상반기 조직 평가결과가 나왔는데 우리 부서가 꽤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상사가 모두를 격려하는 자리에서 가장 크게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나의 공헌도가 심하게 미미할지언정 천장을 두어 번 바라보며 '그래 해냈어'라는 표정을 짓는다. 원래 축구도 골 넣은 놈보다 더 심하게 세리머니 하면 사람들은 내가 지대한 공헌을 한 줄 안다.

4. 회사 걱정을 세상 격하게 한다.


"요새 경기가 안 좋아서 우리 업계가 말이 아닙니다."

점심시간 밥상에서 상사가 던지는 거시적 관점의 걱정에 가장 크게 반응한다. 밥숟갈 내려놓으며 밥맛 몽땅 달아났다는 표정으로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잠을 설칩니다 요새" 같은 류의 탄식과 식당 천장을 수차례 바라보면 애사심이 상당한 직원이라는 인상을 준다.


근데 매년 고과 평가 때 결과를 보면, 상사는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오늘도 살아 돌아왔다. 다행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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