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다멜리 Jun 07. 2021

나는 더 이상 코스모폴리탄을 읽지 않는다

산후 조리원과 코스모폴리탄? 그 최악의 미스매치에 대하여

패션 업계 마케팅팀에서 근무했던 내 사무실 책상에는 항상 패션 잡지들이 즐비했었다. 직원들은 업무나 심심풀이용으로 잡지를 가져다 보곤 했는데 그 중 여자 동료들 사이에 단연코 인기있는 잡지는 '코스모폴리탄'이었던 것 같다. 잡지들이 배달되는 매달 20일쯤이 되면 도둑 고양이가 다녀갔는지 '코스모폴리탄'만 쏙쏙 빠져나가곤 했다. 패션, 뷰티는 물론이고 연애나 섹스, 커리어 등을 넘나들며 워낙 읽을 거리들이 많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또한 거의 3kg은 넘을 거 같은 코스모폴리탄 책을 들고 지하철 안에서, 내 방 침대 위에 엎드려 열심히 탐독했던 적이 있었다.                                                                                                                                                       

Photo ©️ __feehcosta, 출처 Unsplash


임신하고 집에서 처묵처묵 했을 때엔 한동안 VOD로 '마녀사냥'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때도 있었다. 쇼파에 드러누워 하루에 4~5편씩을 스트레이트로 봤었는데 이걸 다 보고 나면 무슨 재미로 이 여름을 견디나 하는 마음에 '아껴봐야해' 라고 혼자말을 중얼거리던 만삭의 여인이 생생히 떠오른다. 남편이나 동생이 '태교에 안 좋을 거 같다'며 그만 보라고 간곡히 권했을 정도. 그래, 그 때까지만 해도 비록 배뿔뚝이 임산부였지만 나는 연애 상담이 여전히 재미있고, 별자리 운세도 궁금하고, 신상백들이나 최신 유행 옷들에 눈이 휙휙 돌아가기도 하고, 헐리우드의 파파라치 컷들을 보며 따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애엄마다. 


애를 낳고 2주간 있었던 산후조리원 휴게실 테이블에 코스모폴리탄이 놓여있었는데 그 광경이 나로서는 너무도 언발란스하고 미스매치로 느껴졌다. '쟤가 왜 여기 와 있지?'하는 느낌이랄까. 애를 출산함과 동시에 나는 코스모폴리탄의 피처, 뷰티, 패션과 기약 없이 한참 멀어져 버렸다는 걸 알았다. 임신했을 때만 해도 막연히 '이제 애 낳고 몸매 다시 돌아오면 예쁜 옷 많이 사 입어야지'하고 생각했었는데 애를 낳고 보니 잡지 속의 패션들은 임산부 때보다도 오히려 더 생경하게 다가왔다. 항상 별자리 운세만은 꼭 확인하곤 했는데 이번달에는 내 별의 여신이 어떤 운을 가져다 줄 지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젖을 먹이고, 유축을 하고, 아기를 재우고, 쪽잠을 자고, 삼시세끼 미역국을 먹는 생활에서 별자리 운세? 섹시한 속옷? 최신 유행 선글라스 따위는 정말 쓰잘때기 없는 소리였다. 


이제 나와 상관없는 소리, 너네 참 부질없다 하면 될 것인데 나는 왜 코스모폴리탄과 내가 더이상 공감대가 없다는 사실에 이리도 쓸쓸할까. 


고등학교 때 나는 인디밴드 관련 잡지들을 즐겨 읽었었고, 아이돌을 좋아하기도 했었는데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들과 이별했다. 왜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어린 날의 내가 민망스럽기도 했다. 마치 한 때 너무 사랑하던 남자가 더이상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을 때 느끼는 허무함이나 권태, 그리고 다른 사랑에 유유히 정착하는 성숙함이 발현됐다. 


그런데 왜 나는 코스모폴리탄과 그렇게 쿨하게 이별할 수가 없는 것일까. 왜냐? 나는 그 남자가 예전보다 더 사랑스러워 미치겠는 거다. 그 남자를 너무 사랑하는데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무엇보다 과거를 잊고 현실에 정착하기엔 지금의 나 자신이 너무 맘에 들지 않아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 그 땐 왜 그랬지? 하하' 하고 웃어넘길 수가 없고 '아, 맞아. 그 땐 그랬었지. ㅜㅜ'라며 지금의 내 신세를 한탄하는 식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나는, 


코스모폴리탄이 너무 보고 싶다. 다시 금요일 7시의 가로수길을 걷고 싶다. 점심시간 여자 동료들과 바삭바삭한 일본식 돈까스를 먹으며 생맥주를 한 잔 하고 싶다. 새로 만나는 사람과 명함을 주고 받으며 미팅도 하고 싶고, 요즘 뜨는 와인바에서 친구들과 신선한 치즈를 먹으며 멋지게 차려입고 모임도 하고 싶다. 월급이 나오면 가끔 동생과 함께 맛사지도 받고 싶고, 남는 시간을 떼우기 위해 잠시 윈도우 쇼핑을 하다 허리가 잘록한 원피스 하나를 지르고 싶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이상 코스모폴리탄을 볼 시간도, 볼 필요도 없다. 


세수할 시간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더 섹시해 질까 고민할 필요가 없고, 경력 단절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커리어나 연봉인상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지금 내 옆의 이 남자와 합심해서 애를 키워내야 하기 때문에 또다른 연애를 꿈 꿀 필요도 없고 남의 연애에 귀 기울일 여유는 더더욱 없다. 그렇게 바쁘고 눈 코 뜰 새가 없는데


공허하다.


그래서 그 공허함을 나는 내 글을 쓰면서 채우기로 했다. 나에게 가치 있는, 나를 위한 글을 담담히 써 내려 가면서. 메말라가는 나의 감수성을 어떻게든 촉촉하고 탄력있게 유지해야 겠다.    


과연 꾸준히 포스팅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아기가 2시간째 자고 있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기가 언제 깰 지는 아무도 모른다.             



2015년 2월, 첫째 6개월 때 네이버 블로그 <자유의 여신상은 애가 있을까>에 게재했던 글                        






















작가의 이전글 칼 가는 남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