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슬로베니아에 도착하고 난 뒤 우린 밴에 큰 문제점이 두 가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밴을 샀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차의 왼쪽 앞부분이 기울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제대로 높낮이를 재어보니 아무래도 왼쪽 앞바퀴의 충격흡수장치가 고장 난 듯했다. 충격흡수장치는 특수한 액체로 채워져 있어서 일정한 높이로 차를 떠받치고 있는데 만일 금이 가거나 깨져서 액체가 새어 나오면 힘을 잃고 내려앉게 된다. 눈에 띄게 부서지거나 액체가 샌 흔적은 없었지만 확실히 차의 왼쪽이 오른쪽보다 낮았다. 이런 부품은 어디서 쉽게 살 수도 없고 산다고 해도 교체할 수 있는 공구도 없었다. 수리를 맡긴다고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란 게 뻔해 보였다.
또 다른 문제는 밴의 천장에 만들어 놓은 창문이었다. 분명히 밴을 만들 때 꼼꼼히 접착제와 방수제를 발라서 창문을 붙여 놓았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슬로베니아 정박지에서 천정 창문 틈으로 물이 줄줄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피렌체에서 침대가 흠뻑 젖어 있었던 이유가 도둑이 들었던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돼서 기분이 좋았지만 빗물이 새는 밴 안에 처박혀 있는 건 그리 기쁜 일이 아니었다. 천정 창문의 바로 밑은 우리가 뒹굴거리고 있던 침대였기 때문에 창문 틈을 수건으로 둘러싸 빗물이 떨어지지 않게 응급처치를 해두었다.
떨어지는 빗물을 수건으로 막아 응급처치를 했지만 삼십 분에 한 번씩 수건을 짜야할 정도로 비는 그치질 않고 오히려 더 세차게 내렸다. 그래도 유명한 여행지이니 비가 와도 뭔가 볼 게 있지 않을까 해서 블레드 호수까지 우산을 쓰고 걸어 나가 보았지만 역시나 비구름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스산해 보였다. 경치 구경은 포기하고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작은 마트에 들어가니 특이하게도 꿀로 만들어진 제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슬로베니아는 양봉업에 종사하는 국민이 2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양봉이 오래된 전통이며 그와 관련된 산업도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여러 종류의 꿀뿐만 아니라 꿀로 만든 와인, 심지어 꿀로 만든 독주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술을 좋아하는 난 꿀로 만든 독주의 맛이 궁금했고 술 마시는 걸 싫어하는 혜아도 웬일인지 꿀술 사는 걸 반대하지 않았기에 동네 주민이 만들었다는 전문적인 패키지 디자인도 되어 있지 않은 꿀술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술을 사들고 난 신나게 밴으로 돌아왔다.
밴을 한창 개조하며 민박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때에는 분명히 혜아가 술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면서 같이 맛있는 와인을 고르고 민박집 손님들과 밤늦게까지 맥주를 마시면서 술이 모자라다고 불평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연인이 되고 밴라이프를 시작하게 되자 혜아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술이 되어버렸다.
물론 나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 유학시절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할 때 즈음에 물보다 싼 맥주 덕분에 저녁 먹을 돈이 없을 때 한 캔 두 캔 마시기 시작한 게 이제는 밤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자지도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통장에 단 돈 만원만 남아 있어도 천 원짜리 맥주 한 캔은 꼭 사려고 했고 잔소리나 다툼으로 마트 장보기가 끝나기 일쑤였다.
이런 우리가 슬로베니아에서 꿀술을 만장일치로 산건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려서 밴 안에만 있어야 하는 답답함 때문도 있을 거고 곧 크로아티아로 넘어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었던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슬로베니아 꿀술은 내가 마셔본 술 중에 가장 맛있으며 가장 뒤끝이 없는 최고의 술이었고 다음 날 슬로베니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가 되어 있었다. 날이 밝고 보니 우리의 정박지는 좁은 시냇물 흐르는 곳이었고 바로 옆은 마을 주민들이 이용하는 길인지 차들이 종종 지나다녔다. 하지만 아무도 방해하지는 않는 듯해서 우리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블레드 호수 구경에 나섰다.
블레드 호수까지 가기 위해서는 근처의 마을 지나가야만 했는데 그 풍경이 너무나 예술이었다. 눈 덮인 새하얀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초록색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들 사이에 띄엄띄엄 집들이 더해져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빈 집이 보일 때마다 저 집을 사려면 얼마가 있었야 할까 하는 생각만 들 정도로 슬로베니아의 블레드는 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는 곳이었지만 현실은 배고픈 여행자이니 열심히 블레드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알프스의 눈이 녹아내려 만들어졌다는 블레드 호수는 가까이서 보면 너무나 맑아 바닥이 훤히 보였고 멀리서 보면 에메랄드 빛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호수였다. 호수 한가운데에는 뾰족한 첨탑이 있는 아담한 교회가 섬 위에 세워져 있었고 그 뒤로는 유명한 블레드 성이 절벽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블레드 호수 한복판의 섬에 세워진 교회에는 아무것도 볼 게 없을 거라는 게 불을 보듯 뻔했지만 주변의 다른 여행객들처럼 우리도 아무렇지 않게 배를 타고 가보고 싶었다. 우린 알콩달콩한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많은 사람들이 타고 건너는 큰 배가 아닌 작은 보트를 큰 맘먹고 빌렸다. 직접 노를 저어야 했고 한 시간 대여에 약 2만 원 정도였지만 우리 둘만 타고 호수를 여유롭게 꽁냥꽁냥(?) 거리며 호수를 휘젓고 다닐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우린 정말 구석구석 다니려고 했지만 수영을 못하는 혜아는 조금만 배가 흔들려도 기겁을 했기에 섬 위의 교회를 보고 바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해는 여전히 머리 위에 떠 있었지만 나는 노를 젓느라 지치고 혜아는 소리 지르느라 지쳐 우린 밴으로 돌아왔다. 9월이 다되어 가고 있었고 우린 그전에 쉥갠국가를 벗어나야 했기에 블레드 호수에 그리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게다가 밴으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문을 꽤나 신경질적으로 두들기며 이해할 수 없는 영어로 여기 머물 수 없으니 떠나라고 하는 바람에 우린 오케이 오케이 하며 바로 침대를 접고 부엌살림들을 흔들리지 않게 끈으로 고정한 뒤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를 향해 출발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물을 언제 얻을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블레드 호수 근처의 캠핑장에 들렀다. 동전을 넣고 100리터의 물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이었는데 우린 배를 타느라 현금을 다 써버린 뒤였다. 하지만 마침 우리 앞에서 캠핑카에 물을 채운 사람이 100리터를 다 쓰지 않아 다행히도 물장난까지도 해가며 공짜로 물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물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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