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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 Nov 07. 2024

단순하게, 그냥 살아. 2

감정의 파고 끝에

언젠가 친한 후배가 말했다. "난 우울한 게 뭔지 모르겠어. 슬프면 슬픈 거고 화나면 화난 거지, 우울한 건 대체 뭐야?" 평생을 줄곧 크고 작은 우울감을 지니고 살아온 내게는 충격적인 질문이었다. 이 감정이 뭔 지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슬픈 일이 생기면 슬퍼지는 건 당연한 건데, 우울한 건 뭐지? 우울한 일이 생겨서 우울한 건 아닌데...

싸늘한 가을바람에 우울감이 몰려올 때도 있고 어떤 이의 무례한 태도에 우울해질 때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는 친구를 올려다보며 우울하기도 하고, 호르몬 때문이기도 했다. 때론 아무 이유가 없었다. 나는 이 감정의 인과관계를 알 길이 없어 뭐라고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울을 모른다고...? 혼자 되뇔 뿐이었다.


더 충격인 건 다른 친구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후배의 말을 며칠이나 곱씹다가 친구에게 "글쎄... 우울감이 어떤 건지를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더라고..." 이야기를 했더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라고 답해서 두 번 놀라고 말았다.

나에게는 분명하고도 잦은 이 감정을 아예 가늠하지조차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도 놀라운 한편, 부럽기도 했다.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자랐으며 어떻게 살고 있길래 우울을 모르는 채 살 수 있을까.


그런데 그 둘은 몇 년 후 차례대로 극심한 우울을 겪고, 이제야 알겠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설명할 길이 없던 그 감정을 경험해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경험하면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알고 나면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경험이 그렇다. 비가역적이다. 아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시기만 다를 뿐 누구나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꼭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실체가 없더라도 심리적으로 괴로울 수 있다. 아무 일이 없어서, 너무 평화로워서 우울하기도 한 것이다.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막상 평화로운 상태가 되면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란 이렇게나 복잡한 존재. 나도 그랬다.

한 인간으로서 쉼 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얻게 되면 허무해지고 또 다른 욕망을 찾아 나서고... 욕망이 없을 때는 도태되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 마음을 무언가로 채워야 했다. 채울 것이 없으면 우울이라도 끌어와 거기에 푹 절여져야 직성이 풀렸나 보다.


부정적인 생각을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이 이어지고 점점 깊어졌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모두 말끔히 사라질 걱정인 줄 알면서도 걱정을 자처했고, 그런다고 달라질 없는 줄 알면서도 밤을 꼬박 새워 고민했다.


육아를 하다 보면 잔잔한 우울감이 아닌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도 있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아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고, 이웃집 엄마의 악의 없는 오지랖에 속이 뒤틀려 뚜껑이 열리기도 했다. 감정의 파고는 점점 더 거세지고 때론 진이 빠지는 날도 있었다. 몸을 쓰는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삭신이 쑤셨다. 말로 사람을 패는 것이 가능하다. 생각으로는 스스로도 팰 수가 있다. 생각만으로 지쳐 나가떨어지는 날도 있고,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한다.

힘껏 당겨 늘어날 대로 늘어나버린 고무줄이 툭 끊어지듯, 요란법석 속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단숨에 온 세상이 조용해진 순간. 조명 스위치를 확 내린 것처럼 정적이 흘렀지만 내 눈앞의 세상은 빛나고 있었다.

 순간 내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내가 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화가 사라졌다. 뭐든 경험하면 몰랐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인데, 나는 화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났던 사람인데, 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런 내가 낯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잠시뿐이겠지라고 생각하고 흘려보내기엔 평생 처음 경험해 보는 고요, 평화, 안도였다. 쉴 새 없이 치던 거친 파도가 사라지고 잔물결조차 없는 잔잔한 호수가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가 1초 만에 병에 걸렸을 리도 없고, 충격으로 정신이 어떻게 된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지지고 볶는 하루 중에 조금 더 스트레스를 받았던 어떤 순간. 화가 고조되며 포효하는 사자로 변할 타이밍에 호수가 된 것이다. 낯선 나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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