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드니의 12월 31일 밤은 세계 최대 불꽃놀이로 유명하다. 시드니의 유명 명소에서 밤하늘의 불꽃을 볼 수 있기에 많은 관광객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시드니에 모인다. 그래서 12월 마지막 주는 시드니의 숙박료가 하늘로 치솟는다. 불꽃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시내에 위치한 호텔들은 자리도 없을 뿐 아니라, 수백만 원의 비싼 숙박료를 자랑한다. 우리는 시드니 시내의 비싼 숙박료 덕분에 공항 근처의 비교적 저렴한 호텔을 잡았고, 이마저도 지금까지 호주에서 묶었던 숙소의 몇 배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시드니에서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와 반나절 정도였다. 나에게 여행의 의미는 복잡하지 않은 여유로움, 아름다운 자연환경, 역사와 예술이기 때문에, 바쁜 도시의 일상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시드니의 도시 역사와 건축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하룻밤만 머무르기로 했다. 오렌지 껍질 모양의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옆에 위치한 로열 보태닉 가든에서 점심을 먹었다. 피크닉을 나온 가족인것처럼 공원에 앉아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고, 너른 잔디밭에서 얼음땡 놀이를 하며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큰 소리로 웃기도 했다. 넓은 공원에서 화장실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새끼 오리와 함께하는 오리 가족도 보았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오리 가족이 신기하다. 남편과 함께한 여행이었다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도시의 공간들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의 기억과 추억으로 쌓여간다.
긴 시간을 공원에서 보내고 오페라 하우스를 나오면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쥐어 주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값비싼 아이스크림이지만 내가 아이들과 조금 더 걸으며 구경하기 위한 당근인셈이다. 페리를 타고 달링 하버로 이동하였다. 오늘 밤 시작되는 불꽃은 다양한 공간에서 진행된다. 바다를 중심으로 대여섯 지점에 불꽃이 준비되어 있고, 해당 장소와 그 위치에 대한 설명은 https://www.sydneynewyearseve.com/ 사이트에 아주 친절하게 적혀있다. 우리는 달링 하버 근처에서 불꽃을 구경하기로 했다. 당일 행사로 인해 취소되는 대중교통 및 늦은 밤이라는 시간적 제한을 고려해서 가장 적합할 것이라 생각한 곳은 달링 하버다. 달링 하버 근처에 놀이터와 분수대가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나의 귀찮음으로 인해 못하게 하는 금지행동들이 몇몇 있다. 그중 하나가 준비되지 않은 물놀이다. 분수대를 보자마다 '엄마 옷 젖어도 돼?' 하고 물어본다. 역시나! 가방 속에는 혹시 본다이 비치를 가지 않을까 해서 챙겨 온 수건과 여벌옷이 있었다. 평상시와 다르게 여행을 하는 동안 여유로워진 나는 흔쾌히 허락하였고, 아이들은 신이 나게 분수 속을 뛰어다녔다. 우당탕탕 뛰어다니며 옷을 적시고 하하하 웃는 아이들을 보면서 일상을 벗어나는 여유가 서로에게 행복을 선사한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저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우리는 자리를 잡기 위해 달링하버 불꽃 지점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난간 돌계단에는 많은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돗자리를 펴고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도 얼른 자리를 잡고 아이들과 그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벌써 51일 앞으로 다가온 새해전야제
나의 성향이 순간의 결정이 주는 행복감(P) 보다 충분한 정보로 계획된 완벽한 일정(J)을 선호했더라면, 나는 로열 보태닉 가든에 앉아서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새해 전야 불꽃은 수많은 명소에서 볼 수 있지만, 로열 보태닉 가든은 입장 티켓이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한정된 인원으로 진행하다 보니, 당연히 일찌감치 와서 자리를 선점하는 수고는 없어도 될 것이다. 미리 예약하지 못해 Sold out 이 돼버린 보태닉 가든은 강제 포기당하고, 우리는 달링하버 적당한 돌계단에 3시간 전부터 앉아서 기다렸다. 자리를 뜨면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있기 때문에 나와 아이들은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남편이 왔다 갔다 하며 먹을 것을 사다 날랐다. 그마저도 대기가 길어 가장 줄이 짧은 곳에서 음식을 사온 남편은 굽네치킨에서 핫도그를 사 왔다. 왜 치킨이 아니라 핫도그냐고 물어보니, 그 식당이 굽네인 줄 몰랐다고 한다. 카드 사용을 알리는 문자에 상호명이 '굽네'라서 치킨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한 나는 황당했지만, 긴 인파를 뚫고 가장 빠른 음식을 구해온 남편에게 감사하며 맛있게 핫도그를 먹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간이 지나 9시가 되었다. 콜드플레이의 'A Sky full of star'의 전주가 흐르기 시작했고, 첫 번째 불꽃이 하늘에서 터지며 나는 전율이 올랐다. 'A sky full of star'은 아이들과 함께 본 영화 씽투게더의 삽입곡이어서, 우리 모두가 즐겨 듣던 노래였다. (특히 나는 죠니의 성장 이야기를 언제나 사랑한다.) 함께하는 시간에 아름다운 노래와 황홀한 불꽃이 눈앞에 펼쳐지자, 우리는 행복했던 여행의 끝자락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축하했다.
이번 여행을 되돌아보니 우리 가족 모두 성장하는 계기였고, 다시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나에게 딸과의 관계에서 딸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딸에게 엄마가 하고 싶은 것도 조금 이해해달라고 제안하는 기회였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 노력하고 있고 아이도 하기 싫은 것도 함께하면서 배려라는 것을 배워보려 하고 있다. 여행은 다른 삶의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다. 나와 아이와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우리는 불편했던 그동안의 감정을 버리고 다시 사랑하는 따뜻한 새로운 감정으로 채워 넣었다. 어쩌면 이번 호주 여행은 우리 가족에서 가장 필요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시드니를 흠뻑 느끼는 하루였고, 그렇게 호주에서 마지막 하루가 지나가고 2023년 첫날 새벽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주 간의 여행이 아쉬운 우리는, 5년 뒤 다시 한번 호주에 오자고 약속했다. 아이들은 정확한 지식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날의 공기와 그날의 온도와 그날의 햇빛과 그날의 감정 같은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