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아이들과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곤 한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현장 학습 개념으로 많은 부모들이 시도하는 일일 것이다. 요즘은 엄마들 사이에서는 단순 방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국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예약하여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여럿 있는 듯하다. 한정적 인원으로 진행되는 교육은 내가 예약할 때는 항상 마감인 것을 보면 말이다. 나 역시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미술관이나 박물관, 생물자원관 등 아이들의 흥미에 맞게 방문하려고 한다.
어렸을 적 학교 소풍으로 박물관이나 역사 유적지를 가본다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겠고 대단한지도 몰랐다. 그냥 중요하고 대단하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푹 빠져있다. 어렸을 적 주입식 교육이 스트레스와 지루함이었다면, 어른이 되고 나서 다른 점은 내적 호기심과 궁금증에 의한 주체적인 공부가 즐거움으로 다가온 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아이들 역시 박물관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느끼는 듯하다. 특히 3학년 큰 아이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박물관과 미술관을 가는 이유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함이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지루하지 않도록 흥미를 가지고 함께 해서 좋은 기억을 심어주고 싶었다. 여행에 대한 추억을 공유할 때나 일상생활 중 관련 있는 주제가 나왔을 때, 함께 이야기하기 좋은 원천인 것이다.
큰 아이는 미술에 관심이 많고 특히나 사람(주로 예쁜 여자아이)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만화 캐릭터 그리는 것에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미술 수업을 무척 좋아한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나 표현의 다양함을 알게 되면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브리즈번의 미술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미술관 입장료가 무료다. 브리즈번의 사우스뱅크 주변에 방문할 수 있는 미술관이나 자연사 박물관이 모여있는데, 대부분 무료다. 물론 특정 전시에 한해서는 유료로 진행하고 있지만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공간도 많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BRISBURN 글자가 있는 잔디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박물관과 미술관이 위치해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Queensland Art Gallery이다. 이곳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큰 아이와 미술관에 가기로 했고, 무료 미술관 중 발이 닿는 대로 도착한 곳이 이곳이다. (사실은 바로 옆에 현대 미술관을 가려고 했던 것이 내 생각이었으나 충동성이 강한 우리 첫째 딸은 일단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짐을 락커에 맡기고 들어갔다. 현대 미술답게 설치 미술도 곳곳에 전시되어 있고, 단순하게 표현된 그림부터 원색으로 가득 찬 유화까지 다양한 미술품이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었다. 재밌는 것은 중간중간 배치된 의자에 앉아 작품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예 간의 이젤을 가지고 작품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큰 아이는 전시되어 있는 미술품보다 그 사람들에게 집중했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보며 크로키처럼 단순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도 있고, 작은 팔레트를 가지고 색칠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뚫어지게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고 있는 큰 아이가 혹시 실례를 끼칠 것 같아 조금 두려웠다.
"딸내미, 너도 그려볼래?"
내가 건넨 질문에 0.1초 만에 "응!"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재료가 없었다. 결국 기념품 판매점에서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씩 샀다. 새 연필을 깎아줄 수 있냐 물어보니 바쁜 와중에도 흔쾌히 깎아 주셨다. 작은 아이도 똑같이 구입하고 나니, 4만 원 정도의 소비가 일어났다. 큰 아이에게 미술관에서의 긍정적 경험을 주기 위해 나는 미련 없이 투자했다. 스케치북과 연필은 미술용이라 그런지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음영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재밌는 표현방법을 터득한 아이는 아주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눈에 콩깍지처럼 아이가 그린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돋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몇 장의 그림을 그리고 가방에 스케치북과 연필을 소중히 넣어두고 우리는 다른 여정으로 향했다.
아이가 그린 그림
미술관에 와서 그림을 그려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미술관에 가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따라다니기 바빴는데, 이제는 조금 컸나 보다. 예술작품을 만지면 안 되고, 뛰어다니면 안 된다 하는 끊임없는 잔소리는 접어두었으니 말이다.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QAG(Queensland Art Gallery)에서 보았던 작품들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며 행복했던 것들이 핵심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이 여행이 주는 묘미인 듯하다.
둘째 아이는 미술에 관심이 크지 않아 아빠와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빠 역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함께 오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다. 쉼터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는 것이 내가 보는 아빠의 주된 행동이다. 작은 아이는 큰 아이보다 호기심이 많고 특히 생물에 관심이 많다. 바로 근처에 자연사박물관이 있었는데, 아빠와 아주 짧은 시간을 보내고 온 것 같았다. 결국은 쉼터에서 큰 아이와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큰 아이 위주로 시간을 보낸 엄마로서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이 느껴졌다. 다음에는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낼게. 하지만 미술관 방문 후, 작은 공간에서 아빠와 함께하는 잡기 놀이에서 아이들은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에서 아빠와 엄마의 역할은 이렇게 나누어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