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바야흐로 2022년 그리고 2023년.
기혼자로 10년, 엄마로서 9년.
나에게 번 아웃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종종 일하기가 싫을 때가 있다, 3년 차, 6년 차, 9년 차마다 고비가 온다고도 말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을 시간이다. 친구랑 치맥을 먹어가며, 백화점에 들러 내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누려가며 통장 잔고를 보고 나를 살살 달래어 다시 현대판 노예로 살아간다. 이직을 하기도 한다. 그 정도의 방황은 지금 생각해 보면 문제도 아니었다.
큰 아이가 2학년이 되면서부터, 갑자기 엄청난 짜증을 표현했다. 1학년때부터 학교 가는 것을 거부했던 아이는 역시나 학교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학교는 친구들과 놀기 위해 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동기인데 1학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자리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다고 했다. 워낙 어린이집 시절부터 누구와 어울려 노는 것보다 혼자의 놀이에 심취해 있던 아이였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문제는 2학년이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치 4살 아이가 자기주장을 펴며 무논리로 대응하듯 맘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어떤 논리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도 사탕발림으로 설득을 해도 아이는 화만 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남편도 아이게에 소리 지르는 일들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세 마리의 공룡이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동안 여린 작은 아이는 눈치를 보느라 항상 우울해 보였다.
짜증을 내다가 외친 큰 아이의 말,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작은 아이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상담할 때 들려주신 이야기,
'아이가 부모가 자기를 버리고 떠날까 봐 무섭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문제를 알고 그만 멈춰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나의 몸과 생각 그 어느 것도 내 이성에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세상에서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성장했고, 나는 상담을 받고 내 아이를 이해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3학년이 되고 아이와 우리 부부는 전보다 성숙해지면서 어느 정도 그 전의 삶으로 돌아왔다. 작은 아이에게는 사과를 건네며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버리는 일은 없다고,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고, 네가 있어서 엄마가 살 수 있다고 속삭여 주었다. 아이와 했던 긴 호주 여행이 어쩌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아이는 나와의 교감을 쌓으며 안정감 속에서 점점 세상을,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문제는 해결이 되었지만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가 어려웠다. 엄청난 무기력 속에 빠졌다. 우울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일에 짜증이 났다.
회사에서 우는 일도 잦아졌다.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회사를 조퇴하고 나오기도 했다. 다시 심리상담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상담사는 일을 줄이거나 일의 완성도를 낮추라고 조언해 주었다. 내가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의 절대적인 양을 줄이고 일의 완성도를 높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즉, 대충대충 일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30년 넘게 이렇게 살아온 나는 대충 할 거면 왜 하나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수 많은 고민 끝에 이 부분은 내가 바꾸지 못하는 부분임을 인정했다. 그러면 나머지 해결책은 절대적인 일을 줄이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직업인 엄마와 회사원,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는 포기 못한다, 아니 엄마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포기할 수 없는 직업이다. 나쁜 엄마가 되는 방법은 있어도 엄마를 포기할 순 없다. 결국 남은 건 회사였다. 회사일을 포기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나는 내가 워킹맘으로서 잘 해낼 줄 알았다. 아이가 어렸을 적에는 주말부부를 하면서도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회사일도 해냈었다. 물론 아이를 안고 매일밤 울고, 저녁은 항상 시간이 없어 먹지도 못했지만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모르는 나의 진심은, 너무나 힘들었고 누군가 도와주길 바랐나 보다. 그게 남편이었으면 했던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알아서 하니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았고 당연히 내가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시 화살은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 스스로 내 목을 죈 것이다. 나의 바람이 처참히 무너지자 결국 내 마음은 남편에게서 멀어졌고, 이제 남편의 역할은 바라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그냥 아이들의 아빠, 육아 동료로서 함께하는 것 같다. 부부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변하는 것 같다. 이런 말을 아쉬운 듯 내뱉으면 지인은 결혼에 의미를 두며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지내는 것이 답이란다.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회사일은 내가 지금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내 삶의 일부였다. 처음에는 무시받기 싫어서 오기로, 그다음에는 그냥 버티기로, 지금은 애정이 생겨서 포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내 커리어보다 나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자. 그리고 스트레스받는 모든 일은, 도덕적 이념이고 사회적 시선이고 무시하고 하지 말자.
그럼 회사일을 관두고 어떻게 살 것인가? 육아와 집안일만 하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어차피 잠시 쉬어 가는 것, 내가 진짜 하고 싶은거 하자. 난 뭘 좋아할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뭘까?
아주 어렸을 적부터 꾸었던 꿈은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 영어 연수를 너무 가고 싶었고, 석사 학위를 받으러 나가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돈이 없어서 겁이 나서 못 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 후회를 짊어지고 사느니 실패하더라고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제일 젊은 지금 해야 한다.
서울에서 열리는 유학박람회를 두 군데 다녀왔다. 그리고 토플책을 중고로 구입했다. 그러고 나서 새벽에 일어나 하루에 한 시간씩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지원할 대학을 알아보고, 어떤 과를 선택할지 고민했다. 회사에서는 '시키는 일'만 집중했다. 경험과 경력이 많은 나는 모든 일을 제시간에 딱딱 맞추어 제출했다. 그리고 남은 에너지는 토플공부에 쏟아부었다. 이상하게 제일 하기 싫은 것이 공부였는데, 토플 공부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뛰고 상사의 지랄도 동료의 짜증도 도인처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어차피 나는 곧 떠날 사람이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스트레스 받는 요인은 없애기로 했다.
한 달에 한번 고향에 내려가는 일을 줄였다. 도로 위에서의 답답한 시간, 가서 TV만 보는 나 자신, 가족들과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닌 의미 없는 시간들을 위해 주말을 보내기 싫었다. 게다가 다녀오고 나면 해야할 빨래와 정리가 쌓여간다. 하기 싫으면 억지로 안부전화도 하지 않았다. 명절에도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나쁜 딸, 나쁜 며느리로 살기로 했다.
남편에게 원하는 사항을 요구했다. 나는 나 혼자 있는 시간을 원한다. 남편은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면 혼자만 남는 그 시간이 싫다고 했다. 나는 반대로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했다. 회식일 때 언제 올 건지 묻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잠들었으면 좋겠다 했다. 아이들은 아직도 엄마랑 자고싶다는 핑계로 내가 오지 않으면 늦게까지 자지 않는다. 아빠와 함께 자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게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2024년 9월, 나는 확실히 번 아웃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일이 이렇게 가슴 설레는 일인지 오랜만에 느끼고 있다. 어쩌면 일을 그만두고 놀 생각을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100년 인생 2~3년 놀면 어떠하리. 열심히 달려온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의 선택이 가장 행복하다. 아직 회사를 그만둔것도, 외국으로 날아간 것도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그러던 와중, 나에게 기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