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아기 원숭이가 우유가 나오는 철사엄마보다 먹이는 나오지 않지만 포근한 헝겊엄마를 택한 실험은 아주 유명하다. 몸은 헝겊엄마의 품에 안겨있고 배고플 때 머리만 뻗어 우유를 빨아먹는 애처로운 모습에서 아이들에게 스킨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전쟁 고아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있다. 생존에 필요한 음식은 공급받았지만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불쌍한 아이들, 정서는 물론 신체적 건강조차 예후가 좋지 않았다.
어릴 적 양육자와 맺은 애착은 아이의 평생에 영향을 미친다. 단순히 부모와의 관계만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애착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불안하고 예민한 아이 때문에 걱정하는 엄마에게 ‘불안정 애착’이라는 단어는 가슴에 사무치는 상처를 준다. 엄마가 너무 과잉보호해서 아이가 예민하다는 둥, 엄마의 불안 때문에 아이가 더 불안하다는 둥.
아이 : 엄마, 나 무서운 꿈 꿨는데 엄마가 있어서 괜찮았어.
엄마 : 무슨 꿈을 꿨는데?
아이 : 유괴범이 나를 노리는 꿈이었어.
엄마 : 어머, 꿈에 유괴범이 나왔어?
아이 : 나는 유괴범 꿈을 자주 꿔. 하지만 눈을 뜨면 엄마가 있어서 괜찮아.
불안이 심한 아이의 마음은 이 정도이다. 분리불안은 ‘못된 버릇’도 아니고 ‘오냐오냐 키운 잘못된 결과’도 아니다. 분리불안은 말 그대로 불안이다. 불안정애착이 아니라 불안. 통제할 수 없는 불안.
한두살 먹은 갓난쟁이었던 내 아이는, 언어로 표현하지도 못할 저만큼의 불안을 안고 지냈다. 낯선 세상이 너무나 두렵지만 오로지 엄마라는 존재에 안정감을 느끼고 그 단 하나의 버팀목에 기대어 버텼던 것. 그런 어리고 여린 아이에게 엄마와의 분리는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마냥 두려운 일이었을 테다.
불안과 불안정애착은 다르다. 엄마와 헤어지면 고통스러워하며 막무가내로 우는 아이에게 쉽게 불안정애착이라는 프레임을 씌우지 말자. 안전기지인 엄마와 헤어지니 불안해서 우는 거다.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쉽게 진정되지 않더라도 불안정애착이라 속단하지 말자. 내 아이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다시 떨어질까 두려워 괴로워했다.
이런 아이에게 인터넷의 조언대로 강경한 수면교육을 했다면? 어른들 말마따나 체벌하며 ‘편하게’ 키웠다면? 그래서 정말 애착을 손상시켰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