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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두리 Apr 20. 2024

인문학과 과학

테드 창의 단편 소설 ‘숨’을 읽고

소설의 주인공은 로봇 인간이며 해부학자이다. 로봇 인간은 교환(탈부착) 가능한, 공기로 가득 채워진 허파의 공기를 소비하며 생존한다. 공기가 부족하면 점점 팔다리가 무거워지고 급기야는 생명이 위험하다. 공기가 다 사용되기 전에 예비 허파로 교환하던지, 공기 충전소에 가서 충전된 다른 허파로 교환해야만 한다. 마치 자동차가 주유소에서 연료를 주유하듯이. 소설은 “공기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나는 진정한 생명의 원천과 생명이 맞이하게 될 종언의 방식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라는 주인공의 말과 함께 소설은 시작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해부학은 손상된 팔다리를 수리하고, 때로는 절단된 것까지 접합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동시에 살아 있는 사람의 인체 생리도 연구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부학이라는 학문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핵심적인 수수께끼 하나가 있었다. 바로 기억의 문제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의 기억 이론에서는 사람의 모든 경험은 뇌 안에 있는 얇은 박판에 새겨진다는 각인설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 이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모든 경험이 그런 식으로 기록된다면, 우리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에 주인공은 기억의 삭제 과정이 기록 과정보다 더 어려울 필요가 없는 방식을 통해 모종의 매체에 저장된다고 주장하는 학파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우리가 망각한 모든 기억은 사실상 사라져 버리며, 우리의 뇌 속에는 도서관에서 찾아 읽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래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하나의 사건이 주인공을 행동에 나서게 만든다. 그는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실험을 하나 고안했다. 자신의 뇌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부해서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추정과 달리, 공기는 단순히 우리의 사고를 발생시키는 엔진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바로 그 매체였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공기 흐름의 패턴이었다. 우리의 기억은 지속적인 공기의 흐름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생명의 실제 원천은 기압차이이다. 공기의 밀도가 높은 공간에서 낮은 공간으로 흐르는 현상 말이다. 우리 뇌의 활동, 우리 몸의 움직임, 우리가 지금까지 만든 모든 기계는 공기의 움직임, 각기 서로 다른 압력들이 서로 균형을 맞추려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바로 그 힘에 의해 작동한다. 우주 어디를 가도 압력이 똑같다면 공기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그 무엇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우주는 엄청난 양의 공기가 비축된 데서 시작됐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한다. 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욕구와 고찰은 우리의 우주가 점진적으로 내 쉬는 숨에 의해 생성된 소용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내 쉼이 끝날 때까지, 나의 사고는 계속될 것이다. 

     

이 소설 속의 시대적 배경은 상상 속의 먼 미래일 것이다. 어쩌면 과학이 극도로 진보하여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의 로봇 세계일 수도 있다. 몸(신체) 자체는 수리해서 계속 사용되기에 죽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기의 공급이 중단되어 숨이 한번 멈추면 예전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 스스로 자신을 해체하고 분석해 본 주인공 해부학자는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되었고, 인간(자신들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의 존재 자체는 공기 흐름의 패턴이고, 생명의 실제 원천은 기압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즘 인공지능(AI)이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 머지않아 일반인공지능(AGI)에 도달하게 되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설 것이라고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작가 테드 창은 물리학자이며 컴퓨터공학자이다. 소설에 나오는 작가의 상상 속 주인공은 거의 인간화된 로봇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로봇인지, 더 나아가 인간보다 더 진보된 로봇이 만든 로봇인지 알려지진 않았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에 미래의 과학자에게 말한다. “탐험자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글을 각인하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묵상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학자 조셉 켐벨 선집인 ‘신화와 인생’의 들어가는 말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새로운 종류의 물리학에는 장(場)과 물질 모두를 위한 자리는 전무하다. 왜냐하면 유일한 실재는 장(場)뿐이기 때문이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바로 이 장(場)이라는 곳이 동양의 신비주의와 서양의 과학이 만나는 곳이다.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캠벨 철학의 근간이다. 물질이란 없다. 모든 것이 장이다. 그러한 구별과 제한은 단지 우리 마음속에만 있을 뿐이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미래 탐험가에게 주는 고별의 말이 어쩜 미래에서 나에게 주는 메시지로 들리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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