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여기⟫ 전시를 위한 글
이 글은 2023년 11월에 쓰였다.
아침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떤 아침은 쾌청하고, 어떤 아침은 안개가 자욱하고, 어떤 아침은 부슬비가 내린다. 천둥번개가 치는 아침도 있다. 그러다가도 또 다음날 아침에는 따스한 여명이 비쳐주기도 한다. 매번 다른 아침이 온다. 아침이 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
꽤 여러 번의 아침을 거치며 외로움을 생각했다. 외로움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형성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일하며 만났던 괄목할 만한 커리어를 낸 여성들이 줄곧 ‘외로움’을 얘기했으니까. 개인의 역량 문제라면 이렇게 많은,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 외로움으로 아파할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이미 만들어진 제도나 장소에서 한 개인이 배제당하고 환대 받지 못할 때 외로움이 형성된다고 가설을 구체화했다.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전략은 문제 해결에서 가장 쉬운 방법이다.
고립과 외로움을 야기하는 장소로서 적대적 건축을 찾아다녔다. 방어적 설계, 배타적 설계라고도 불리는 적대적 건축은 의도적으로 행동을 유발하거나 제한하는 설계 전략이다. 예를 들어 도시 계획가이자 건축가인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가 1900년대 초중반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고속도로에 설계한 낮은 고가도로 같은 것들이다. 해당 고가도로 밑으로는 버스가 통과하지 못한다. 고작 고가도로의 높이로 대부분의 대중교통 이용자인 사회적 하층민은 휴양지를 방문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자연스레 공원이나 해변은 세단과 같은 자가용을 소유한 부유한 미국인만이 접근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된다.
양로시설 역시 크게 적대적 건축의 카테고리에 포함될 수 있다. 도시에서 멀고,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점에서, 그 이면에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아야 할 대상들을 규격화된 건축물에 모아 놓고 감춰 놓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
사진가 캐롤 슈디악은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양로시설 ‘까사 데 베타니아’의 요가강사로서 5년간 자원봉사를 했다. 슈디악은 내게 줄곧 이 양로시설을 ‘집’으로 묘사했다. 매주 화요일 오전 집의 노인들과의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 시작 전, 슈디악은 집을 돌아다니며 각 방의 노인들을 찾아다녔다. 수업 시간을 알리려는 목적도 있지만, 친구와 나누는 아침 대화이기도 했다. 신뢰관계 위에서 노인들은 문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음의 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때처럼 수업 시작을 알리던 길에 슈디악은 아침 햇살이 침대 위에 앉은 한 노인의 어깨를 감싸는 장면을 발견한다. 최장수 입주민인 98세의 에스뗄이었다. 방에 드리운 빛과 향기 혹은 냄새, 사물들… 모든 것이 그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오후에는 요가 강사가 아닌 사진가로서의 미팅이 있어 마침 카메라는 배낭에 있었다. 슈디악은 사진을 촬영해도 되냐고 물었고 에스뗄은 죽은 딸의 초상을 들고 싶다고 답했다. 98세의 엄마와 8개월의 딸, 사진은 그 둘의 매개체가 됐다. 에스뗄의 발은 불편했지만 사진을 통해 시간을 오갈 수 있었다.
발데미라, 살바도르, 비발도, 마리아 콩슈탄자, 카스토리나… 그들은 자신의 방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 속 그들의 방은 작고 높다. 아마 1.5평 정도의 규격화된 작은방에는 쇠창살이 달린 작은 창이 있다. 똑같은 침대와 선반 등의 가구도 있다. 그러나 각각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창가에 조화를 놓거나, 가족과 친구의 사진으로 가득 채운 제단을 마련하기도 했다. 멀리 떨어진 가족들의 사진 옆에 ‘아마도, 여기’라고 부르는 자신의 자리를 남겨두면서. 그 여백은 이 사진 연작의 이름이 그리고 전시의 제목이 됐다.
3.
쉽게 외로워질 수 있는 양로시설에서 노인들은 작은 선택을 해나간다. 직업을 결정짓거나 무언가를 사고파는 큰 결정이 아니다. 낯선 이가 제안하는 요가 수업을 듣겠다는 선택, 기꺼이 몸을 움직이겠다는 선택, 방문을 열어 대화를 나누겠다는 선택, 사랑하는 사람들의 혼을 간직하겠다는 선택, 삶의 마지막에서 내 곁에 두어야 할 것들을 고르는 선택… 이것은 삶을 탐험하는 사람들에게 나오는 태도다.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자세, 이는 삶의 더 깊은 곳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게끔 한다. 작은 선택들의 결과는 긍지가 된다. ‘Possibly, Here’ 연작은 행동하는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초상이다.
개인의 작은 선택만 있을 수는 없다. 변화하는 개인을 발견하고 손을 내밀어 줄 사람도 필요하다. 기꺼이 다가가 팔짱을 낄 사람/사람들. 촘촘하게 얽힌 팔들이 만들어 내는 단단함과 열기가 단단하게 고착화된 무언가를 결국 녹여낼 수 있다. 슈디악은 손을 내미는 사람이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에게 요가를 가르치겠다는 마음을 먹고 양로시설 행정팀과 논의를 해 무료 수업을 만들고, 우연히 시작된 초상 사진을 선물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그들을 연결한다. 노인들의 방에는 주로 과거의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슈디악이 찍은 사진이 그 사이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손을 내미는 슈디악의 행위는 신뢰에 기반한 관계를 형성한다. 아주 천천히. 슈디악의 사진들은 공동체를 지키는 연대감을 뜻하는 동시에 개인의 미시사다. 작은 선택들과 연대의 용기가 모였을 때, 외로움을 야기하는 시스템이 바뀐다.
사회구조적으로 형성되는 외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슈디악의 사진에서 찾았다. 그것은 작은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그리고 손을 내미는 용기다. 본 전시에는 사진과 함께 다섯 개의 에세이가 있다. 캐롤 슈디악의 사진을 보고 쓴 김규진, 박초롱, 이연, 이훤, 하미나의 글이다. 애쓰다, 시도하다(essayer)라는 불어에 어원을 둔 에세이들은 외로움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다섯 명의 손을 내미는 용기였다. 다섯 편의 글을 모두 읽으면 더욱 확실해진다. 인종, 문화, 언어, 국가, 대륙. 모든 것을 관통하는 건 결국 인간 본연의 이야기라는 것이.
아침은 그 모습이 무엇이건 간에 그냥 오지 않는다. 쉴 새 없이 변하는 것들 속에서 끝내 변하지 않는 것들, 즉 밤새도록 쌓은 선택들과 연결을 위한 용기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침이다. 여기가 사회 구조적으로 형성되는 외로움을 전복시킬 출발선이다.
어떠한 아침도 저절로 오지 않았다.
글. 정수경 (턱괴는여자들)
«아마도, 여기»
일시 : 2023.11.30-12.30
운영 시간 : 평일 14:00-20:00 / 주말 12:00-20:00
전시 장소 : 도만사(도시를만드는사람들) 서울시 성동구 광나루로4길 12 102호
디자인 : 스튜디오 유연한
인화 및 액자 제작 : 얄라 스튜디오
주관∙주최 : 턱괴는여자들∙Rouge
후원 : Stibee, 소소문구, 감선옥
캐롤 슈디악 Carol Chediak(b.1979)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베이스로 뉴욕과 도쿄 최근에는 독일에서 활동한다. 사진을 기반으로 인류의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연결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대부분 지역에 뿌리를 둔 작업이지만 세계의 다양한 도시에서 작업을 선보인다. 이것이 다양성의 아름다움과 인류를 연결시키는 실이라고 믿는다. 캐롤 슈디악의 작업은 직접 몸을 움직여 대상과 교류하고 매개하는 '행동'에 기반한다.
턱괴는여자들
"인문학과 공감 능력이 세상을 구한다"는 기업 철학으로 책과 전시를 만든다. '턱 괴기'는 미술사에서 오래된 도상이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서 보이듯 사색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의 턱 괴기는 의문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기 위해 박차고 일어나는 행위를 포괄한다. 이는 사회의 이면을 깊게 관찰하고, 보이지 않는 구조가 지닌 힘의 역학을 판별하기 위함이다. 그 동력으로써 책과 전시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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