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코
아빠가 희미해진다.
꽤 오랜시간 목구멍이 간질거린다. 하고 싶은 어떤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정리가 안돼서. 부끄러워서. 그 앞에서는 언제나 시크한 딸이었어서. 목에 걸린 말들을 꺼내 글로 전할 수 있을까.
아빠는 1961년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자랐다. 젊고 예뻤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삼남이녀 집안의 막내 아들. 대학교수인 아버지와 의사 형, 은행원 형이 있었다. 엄격한 집안이었지만, 큰 형이 나름대로 아버지의 염원을 이뤘으니, 막내아들 쯤이야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빠는 공부보다 산을, 음악을, 책을 좋아했다. 요리도 잘했다(친구의 대학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전국대학산악협회 회장을 맡을 만큼 산에 진지했다(생활이 어려운 협회 대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내주기도 했다). 음주가무도 좋아했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끝까지 반대한 할아버지로 인해 회사원이 되었다. 1990년대 IT-벤쳐 붐에 올라타 컴퓨터 사업도 했다. 이후에는 무역업을 했다. 아빠의 거래처인 인도, 파키스탄 동료들은 출장오면 우리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한국 식사를 대접해야 한다고 했다. 맞벌이로 바쁜 우리집에는 인테리어 따윈 없었지만, 항상 인도에서 온 상아 코끼리와 전통모자, 화려한 카페트 등이 있었다.
아빠는 자주 사람들을 도왔다. 가족이 어렵다면 나섰다. 친가든 외가든. 어렸을 땐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었는데, 내가 회사를 꾸려보니 누군가를 도와주는게 결국 미래의 나를 구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교훈을 아빠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아빠는 2022년 4월 5일 영면했다. 아주 따뜻한 날, 흰나비와 함께.
회사를 오래 경영해서 그런가, 하도 해외출장을 다녀서 그런가, 해외파견근무를 오래해서 그런가, 술 담배를 끊지 못해서 그런가. 아빠는 점차 약해지고, 곧이어 크게 아팠다. 신장이 제 기능을 못했다. 2017년, 나의 오빠는 신장을 아빠에게 기증했다. 신장이식 수술 후에도 정기적으로 대학병원을 다녔다. 추적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몸은 안좋아졌다. 주에 3회 신장 투석을 받아야만 했다. 배에는 복수가 찼다. 예전의 아빠가 아니었다. 자잘한 기억들을 잊는 경미한 치매증상을 보였다. 병원에서는 대대적인 수술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장애판정 2급을 받았다. 그때 나는 프랑스에 있었다. 아빠가 수술대에 오른 날, 나는 학기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서관에 앉아 조용히 울었다. 입은 계속중얼거렸다.
'정신차려. 정신차려. 정신차려'
프랑스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2020년 초봄, 코로나가 터졌다. 프랑스는 봉쇄됐다. 마침 전시 기획 업무로 한국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는데, 더 체류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박사과정 세미나가 온라인으로 변경된 덕분에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곧장 운전 면허를 땄다. 내 나이 30, 아빠를 태우고 병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운전 면허를 딴 바로 다음 날, 나는 오빠를 옆에 태우고 강변북로와 올림픽도로, 여의도, 압구정, 성수동, 홍대를 가로지르며 운전을 익혔다(스파르타, 그 자체인 우리집).
결정의 이유가 '가족을 사랑하는 딸'이라서는 아니다. 가족들은 간병에 완전히 지쳐있었다. 나는 아픈 아빠를 처음 마주했지만(제대로는), 엄마와 오빠는 아빠를 3년 째 지키고 있었다. 대학 병원 검진을 가려면 오빠와 엄마는 하루 연차를 내야만 했다.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 병원까지 차로 이동하고, 거기서 휠체어를 빌려 내과-안과-심장외과 등을 쭉 순례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그럼 정확히 하루가 다 소요된다. 각 과의 진료를 하루에 모으기 위해서는 엄청난 행운과 전략이 필요하다. 쏟아지는 환자를 받기에 의사 선생님들은 완전히 지쳐버려서 AI 같이 비슷한 말만 계속 반복할 수 밖에 없고, 대학병원이라는 거대한 치료기계 안에서 환자와 환자 가족은 종종거림에 지쳐버린다. 모두가 지쳐있는 진료실 안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스케줄을 잘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각 과의 검진을 각각 받기 위해 1년에 N회 이상 대학병원에 와야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엄마와 오빠는 이 행위를 벌써 3년 째 해왔던 것이다.
아빠의 몸은 이미 신장을 시작으로 서서히 망가져갔다. 후유증이 눈으로, 심장으로, 방광으로, 치아로, 손끝 발끝으로 모두 향하고 있었다. 매끈하고 잘생겼던 얼굴은 어디가고 15키로 이상 빠졌다. 손과 발도 검게 변해갔다. 가끔 아빠가 누워있을 때, 죽음이 시각화된다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기도 했다. 아픈만큼 아빠는 화도 많아졌다. 환자와 함께 가족들은 서서히 죽어간다. 우리집은 그렇게 생기를 잃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내가 감각한 우리집은 그랬다.
나는 작은 차에 아빠를 모시고 병원에 다녔다. 죽음이 서린 집에서 그를 꺼내 햇빛 아래 놓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놓고,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를 손에 들리는 일. 연구 빼고 대부분 어설픈 내가, 서투른 운전 실력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왕복 4시간 -진료를 다 보고 나오면 퇴근 시간에 걸친다-, 자동차란 운전자가 폭군이 될 수 있는 장소이기에, 나는 아빠의 취향을 존중해주지 않는 K-pop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봄에는 열어 놓은 창문으로 벚꽃이 들어오기도 했다. 수없이 교차하는 빨간불과 파란불 사이, 나는 아빠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나: "얘네는 에스파야. 난 얘네가 좋더라.“
아빠 : "넌 요즘 무슨 책 읽냐? 『징비록』을 읽고 싶던데, 주문해 줄 수 있어?"
나: "요즘은 화상회의로 모든 걸 다할 수 있어, 전염병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어."
아빠 : "아빠는 네가 책을 쓰게 되어서 그게 정말 기뻐. 알지, 아빠 꿈이 작가였던 거."
정기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프리랜서로 전시를 만들던 갤러리에서 정규직이 되어 줄 것을, 좋은 연봉과 함께 제안했지만, 그럼 아빠는 하루종일 혼자 집에 있어야 했다. 한국은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호법이 촘촘하게 마련된 나라다. 하지만 아빠는 장기요양보호법 상 나이에 의해 혜택의 대상자가 되지는 못했다. 더욱이 아빠는 우리가 출근했을 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데이케어센터를 가는 것을 극구 거절했다. 재가요양보호사가 오는 것도 극구 반대했다. 아빠 나이 60대 초반, 한창일 나이에 패잔병으로 보이기가 죽어도 싫은듯 했다. 가족은 아빠를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프리랜서로 계속해서 전시와 도록, 책을 만들었다.
덕분일까. 프리랜서로 계속하던 일들로 창업했다. 출판 및 전시기획사. 돈을 받고 콘텐츠를 제작해주는 일은 저작권이 모두 의뢰 회사에 귀속됨으로,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 외에 지적 재산이 쌓이지는 않는다. 리모트 근무가 가능한 업무는 돌봄 가족에게 필수 조건이었다. 그러다 창업을 하게 되다니, 삶은 한 순간도 쉽지 않고, 한 치도 알 수가 없다.
창업하고 첫 책의 인쇄감리가 끝난 날, 인쇄소가 있는 파주에서 동료들과 회포를 풀고 있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다급했다. 상태가 급격하게 안좋아져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집에 급하게 가달라는 전화였다. 귀가한 집의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바닥을 계속해서 닦았다. '50kg 나가는 사람의 몸에는 3,500ml의 피가 있다던데, 아빠의 몸 안에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피가 남아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당시 아빠의 몸무게는 45kg 정도였다. 집 정리가 끝난 후, 나는 곧 병원 짐을 챙겼다. 이제는 도사다.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있다. 짐가방을 챙기고, 정신없이 구급차에 탔을 엄마의 겉옷과 가방을 챙겨 병원으로 갔다. 내가 도착할 무렵, 아빠는 간신히 응급실 배드 하나를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는 코로나가 한창인 2022년으로 아빠는 1시간 30분 이상 구급차 안에서 배드를 기다렸다. 이대목동병원, 여의도 가톨릭대학병원 모두 거절했다. 간신히 부천 순천향병원에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약 이 주, 아빠는 응급중환자실에 있었다. 장 출혈이 지속되고 있는데 지혈이 되지 않는 것이 원인이었다. 지혈제를 쏟아부어도 잡히지 않는다는 게 의사 소견이었다. 병원에서는 매일 저녁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임종을 앞둔 환자를 대상으로 면회가 하루 1회 15분 주어졌다. 온몸을 소독하고 칭칭 감고 응급중환자실에 들어가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감사했다. 아빠가 희미하게 의식있는 날도 있었다. 창업하고 첫 책, 아빠는 내 책이 세상에 나온 날이었다. 아빠는 내 책을 보고 눈을 꿈뻑였다. 좋다는 뜻이라고 이해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책을 아빠 머리 맡에 놓고 가도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 했다.
며칠 후, 우리에게 허락된 15분이 아닌 시간을 골라 아빠는 홀로 떠났다. 꽃샘 추위가 이어졌었는데 상치르는 동안 봄이 왔다. 아빠는 산이 포개지는 아름다운 풍광이 바로 보이는 땅에 누었다. 그 땅에 아빠가 마지막으로 읽던 책과 내 책을 함께 보냈다.
아빠가 희미해진다. 삶이 쉽지가 않아서 자꾸 뿌리를 잊는다. 잔가지들이 나무 기둥을 가리는 격이다. 회사에 문제가 터지면 닥치는대로 문제 구멍을 틀어막는다. 그래도 '몸'은 아빠를 기억한다. 눈이 자꾸만 또다른 세상을 본다. 아빠를 돌보면서 즉, 돌봄의 언어를 체득하고, 돌봄의 시간을 견디면서(괴로워 울었던 날도 많다) 내가 확장됐다. '아픔'은 너무나 쉽게 한 사람의 신체와 정신을 더 나아가 한 가족을 얼마나 파괴한다. 조심해야한다. 너무나 쉽게 환자를 미워할 수 있게 되므로. 또 비릿한 자기연민을 품게 되므로. 아픔을 겪는다는 사실만으로 당사자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아서 프랭크는 "아픈 사람들은 이미 아픔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말했다. 아빠와의 시간은 내게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시력을 남겨주었다. 또, 죽음의 냄새를 맡게 됐다. 죽음은 냄새로 알 수 있다. 사람에게도 나고 장소에서도 난다. 소독약 냄새, 병원 냄새. 어쩌면 자주 씻지 못하는 신체의 쿰쿰한 냄새. 그 너머 희뿌연 안개같은 냄새가 난다. 해가 뜨면 사라질 청명한 새벽 공기가 아닌 땅에 들러붙은 눅진한 기체. 죽음의 냄새는 각인된다. 그 냄새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빛으로 내달리게 한다. 아빠를 차에 실어 태양 아래를 달렸던 것처럼. 죽음의 냄새를 맡은 나는 태양을 향해 계속해서 달린다. 남은 시간, 죽음으로부터 멀리 더 멀리 내달릴 수 있도록. 조금 더 치열하게. 정확히 죽음의 반대방향으로, 태양으로.
요즘도 흰나비가 지나가면 잠시 멈춘다. '아빠다.'
희미해지지만 괜찮다. 삼 년의 투병을 함께하며 아빠가 남긴 것들이 모두 내 몸에 있다.
확장된 신체와 타인을,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