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 de triomphe du Carrousel, Paris
파리를 걷다 보면, 시간이 닻처럼 정박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엔 지금도 있고, 100년 전도 있고, 400년 전도 공존하고 있어서, 걷고 걷는 행위가 미술관의 중세시대, 고전주의 시기 혹은 인상주의 시기를 관람하는 느낌을 준다.
코로나로 인해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강제 안식년'을 갖게 되면서 처음엔 좌절도 했다가, 지금은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로 했다.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 못했던 '파리 건축 산책' 포스팅!
선택의 기준은 없다. 지금 막 생각났고, 내가 좋아하는, 내 기준 근・현대 건축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물들 하나씩 하나씩 꺼내볼까 한다.
기준이 없어도, 시작은 중요하니까. 이 시리즈의 시작은 바로 루브르 박물관과 뛸르리 공원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카루젤 개선문으로.
카루젤 개선문 (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은 ‘파리’의 ‘개선문’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샹젤리제 거리 끝에 서있는 개선문과 동시에 지어졌다.
사실 파리에는 개선문이 여러 개 있다. 루이 14세의 명으로 지은 4개의 개선문 - 우리나라로 치면 사대문 같은 개념. 2개는 파리가 확장하면서 부셨고, 지금 2개가 남아있다 (Porte Saint-Denis / Porte Saint Martin).
1806년, 지금의 체코에 있는 Slavkov u Brna라는 도시에서 1805년에 있었던 'Austerlitz 전투'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주문이었다. 주문을 받아 제작한 건축가는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무한한 신임을 받고 있었던 건축가 듀오, Charles Percier(샤흘 뻭시에흐, 1764-1838)와 Pierre Fontaine(삐에흐 퐁텐 1762-1853)이었다. 나폴레옹 시대를 호령했고, 'Style Empire (제국양식)'을 만들며 이후 세대에 큰 영향을 미친 이 둘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해야겠다.
카루젤 개선문이 지어진 시기를 살펴보면,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고, 프랑스는 유럽 정복전쟁에서 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정치 체계가 바뀐 나라에서 흔히 그랬던 것처럼, 나폴레옹의 프랑스도 정치적인 이미지를 과시하기 위해 새로운 건축, 장식 스타일이 필요했다. 카루젤 개선문은 그런 나폴레옹의 정체성을 잘 담고 있다. 군인 출신인 이 키가 작은 남자는 거대하고 웅장한 요소들을 좋아했고, 이집트와 이탈리아 정복전쟁을 거치며 가져온 모티프들을 장식이나 건축물에 사용하기를 원했다. 특히, 실내장식예술에서 독자적인 유행을 이끈, ‘Style Empire (제국 양식)’은 나폴레옹의 취향을 반영해 고대 그리스나 로마 혹은 이집트 예술에서 상당한 부분 영향을 받았다. 사자, 백조 등의 동물과 스핑크스 같은 요소들이 특히 가구에 삽입되곤 했다.
건축에서는 나폴레옹의 ‘웅장한 스타일’에 대한 취향이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을 19세기 프랑스에 부활시켰다. Percier와 Fontaine은 기원 후 203년에 지어진 로마의 Arc de Septime Sévère를 차용해 카루젤 개선문을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고대 로마의 시저의 후예라고 생각했으니, 로마의 개선문을 차용한 프랑스의 개선문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코린트 양식의 대리석 기둥, 전쟁에서 겪었던 에피소드가 새겨진 부조 장식, 아치 터널 속의 꽃 장식 그리고 황제의 이륜 전차까지. 고대의 요소들이 현대 프랑스에 다시 태어났다. 카루젤 개선문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힘과 권력에 대한 야망을 잘 보여주는 건축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로마의 건축물이 시대를 거슬러 그대로 파리로 온 것일까? 뻭시에흐와 퐁텐의 개선문에는 19세기 초, 현대적인 코드가 담겨있다. 첫 번째는 ‘재료’다. 짙은 벽돌 색과 분홍빛을 띄는 대리석, 청동으로 만들어진 코린트 양식의 기둥머리와 기둥 바닥. 이 두 재료들은 전체적으로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개선문에 컬러를 입히며 생동감을 준다. 팁이 있다면, 카루젤 개선문을 보고 뒤를 돌아 루브르 궁전을 바라보기! 무채색의 건물과 카루젤 개선문의 색채의 대비를 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둘째, 나폴레옹 정복전쟁에 참여했던 여덟 명의 군인들의 동상이 각각의 대리석 위에 세워져 있다. 모두 다른 부대 출신으로 이들이 입은 갑옷들은 모두 다르다. 이 또한 로마의 군인들과 비교했을 때 (그들이 글레디에이터와 같은 갑주를 입었다면), 1800년대 초 프랑스 군부대들의 갑옷을 비교하는 재미를 준다.
셋째, 꼭대기에 놓인 네 마리의 말을 타고 들어오는 여인상. 1797년 이탈리아 정복 후, 베니스의 Saint-Marc예배당에서 가져온, 그 이전에 이 말들은 1204년에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가져온 베네치아 인들의 보물이었다. 중세의 보물을 다시 파리로 가져온 그야말로 힘이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처음 Percier는 이 상징적인 베니스의 말들이 이끄는 로마 전차를 타고 들어오는 나폴레옹의 조각상을 조각가 François Lemot에게 주문했다. 중세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이탈리아인을 정복한 나폴레옹이라는 이미지!
하지만 나폴레옹은 공적인 건축에 본인의 영광을 조명하기 위한 조각상은 ‘자신의 군대’를 기념하기 위한 본래의 목적에 위반된다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 나폴레옹의 “조각들을 들어내거나, 더 나은 대안이 없다면, 전차만 남기고 비워라”라는 명에 따라 황제의 조각상은 비워졌다. 이후, 1815년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남에 따라 네 마리의 말들도 베니스로 환송되었다. 1827년에 만든 조각상의 모습들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다. 네 마리의 말들은 오리지널을 본떠서 만든 레플리카이고, 여기에 평화를 상징하는 알레고리인 여인상이 전차 위에 추가되었다. 양 옆의 도금된 천사 조각상들은 Saint-Marc 예배당의 말들을 둘러싸고 있던 오리지널이다.
이렇듯 고대로마의 영광을 파리에 재현할 것을 원했던 나폴레옹과 그의 열망을 실현시킨 왕실 건축가 펙씨에흐와 퐁텐. 하지만 그 ‘고대의 특히 그리스 로마의 이미지’를 들어내 보면 그 속에는 동 시대성을 융합한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Percier의 시도처럼 당 시대의 요구를 담은 고전적 건축물은 이후 19세기를 관통하며 계속해서 반복된다.
위치
직접 가서 볼 때, 카루젤 개선문의 위치가 좀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루브르 미술관이 뛸르리 공원으로 팔 벌려 서있는 것처럼 뒤집어진 ‘ㄷ’ 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그 중간에 덩그러니 서있는 모습. 왜 하필 이곳에 개선문이 지어졌는가 질문하기 위해, 이곳이 쓰인 방식을 먼저 살펴보자.
‘카루젤’이라는 명칭은 ‘말을 타고 하는 퍼레이드’를 뜻한다. 루브르의 카루젤 광장은 즉, 루이 14세가 자신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기념으로 말을 타고 뽐내듯 걸어간 행사에서 이름을 따서 ‘Grand Carrousel (위대한 퍼레이드)’라고 명명했다.
이 이미지 정면에 위치한 건물이 바로 1564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867년까지 차곡차곡 완성된 ‘뛸르리 궁전’이다. 루브르의 두 1871년 ‘파리 코뮌’시절 시민들이 지른 불에 무너질 때까지 프랑스 왕들의 공식적인 생활공간으로 권력의 중심이었다. 나폴레옹도 파리에 머물 때는 이 궁전에서 생활했다. 따라서 뛸르리 궁전 정문에 바로 이어지도록 지어진 카루젤 개선문은 루브르와 뛸르리 궁전을 잇는 역할을 했다.
1802년, 1차 집정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뛸르리 궁전에 입성하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삽화. 루이 14세가 머물렀던 방을 쓸 수 있도록 건축가 Leconte에게 인테리어 수정을 명하던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아직까지는 카루젤 개선문이 지어지지 않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1810년 뛸르리 궁전 앞. 카루젤 개선문으로 나폴레옹의 군대가 행진하는 모습을 담은 역사화를 보면, 나폴레옹 조각상 없이 베니스의 말들이 상부를 장식한 것이 보인다.
뛸르리 궁전 정문 축에서 카루젤 개선문 그리고 저 멀리 우리가 알고 있는 Étoile개선문의 모습. 오벨리스크도 보인다. 재미있는 건, 카루젤 개선문과 Étoile개선문은 뛸르리공원과 샹젤리제대로의 일직선으로 이어진 중심축에 양 끝에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지어진 이 개선문들이 사실 한 선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래서, 뛸르리 궁전의 화재는 루브르 궁전과 뛸르리 공원 사이에 확 트인 시야를 가져다 줬다. 동시에, 카루젤 개선문부터 오벨리스트, Étoile 개선문 그리고 라데팡스의 신개선문까지 이어지는 기념비적인 축을 우리의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줬다. 뛸르리 궁전이 있었다면 볼 수 없었던 모습일 거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여기서 한번 크게 느껴진다.
가끔 루브르 근처를 산책할 때, 해 질 녘에 이 개선문을 찾아간 적이 있다. 노랗게 물든 하늘에 저 뷰를 보고 있자면 치밀한 계산과 촘촘히 쌓인 시간들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을 만든 사람들이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들의 이야기.
주로 역사에 남는 미술은 지배계층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들이 많다. 카루젤 개선문은 그중에서도 콘스탄티노플부터 베니스로,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로, 700년을 거슬러 이루어진 권력의 이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올바른 취향(Goût, 여기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으로 시민(혹은 백성)들을 가르치려는 교훈적인 목적을 지녔던 ‘신고전주의’는 이제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자신들의 힘으로 쟁취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제국 스타일(Style Empire)이 나폴레옹과 프랑스 사람들의 자신감을 잘 보여주는 시대적인 상징인 것처럼. 당대 프랑스인들에게 상위 미술과 문화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가져온 수백 개의 작품들은 개선문을 통과해 루브르 미술관으로 들어왔다. 이탈리아의 작품들 - 베니스의 청동 말들을 포함해 -이 파리로 들어오는 행사에는 성대한 음악이 동원되고 많은 백성들의 환호를 이끌었던 국가적인 행사였다.
오랫동안 가져온 (일종의) 자격지심?을 해소한 행사였을까?
무엇보다 건축사에서 카루젤 개선문을 포함해 뻭시에흐와 퐁텐의 작품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첫 시작에 있는 작품이다. 프랑스 대혁명부터 나폴레옹의 제국 시기까지의 정치적인 급변에 맞물려 근본적인 취향과 사회의 지배계층의 구조, 그로 인한 사회의 요구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을 레퍼런스로 하는, 다양한 재료와 컬러를 사용하며 새로운 지배계층에 요구를 충족시키는 건축은 19세기를 관통하며 어떻게 발전하게 될까.
다음 이야기에서는 뻭시에흐와 퐁텐에서부터 시작한 변화 중, '색감'을 입은 건축물들의 발전을 살펴볼까 한다.
작품 캡션
1) PERCIER, Charles, DIDOT, Pierre, Vue de la tribune et d'une partie de la salle des maréchaux, au Palais des Tuileries, extrait dans le Recueil de décoration intérieures, comprenant tout ce qui a rapport à l’ameublement, comme vases, trépieds, candélabres..., Paris, P. Didot l’Ainé, 1812, ©The New York public Library
2) PERCIER, Charles, DIDOT, Pierre, Lambris, fauteuil, trépied, vases et autres accessoires, exécutés pour le cabinet du roi d'Espagne, op.cit. ©The New York public Library
3) SILVESTRE, Israël, CHAUVEAU, François, PERRAULT et Charles, Decurso ad Capita et quinque Turmarum in Amphitheatro stationes dispositæ. Dies prima, Courses de testes et dispositions des cinq quadrilles dans l'Amphiteatre, première journée, Courses de testes et de bague faites par le roy et par les princes et seigneurs de sa cour, en l'année 1662, Paris, Imprimerie royale, 1670, ©The New York public Library
4) Louis Léopold Boily, Le Premier consul ordonne à Leconte la réfection et l'aménagement des Tuileries, 1802, ©Bibliothèque du Congrès
5) BELLANGE, Joseph-Louis-Hippolyte, Un jour de revue sous l’Empire, 1810, ©RM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