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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Aug 16. 2020

숨이 되어 주는, 바람멍

안녕?

어제는 바람이 정말 좋았던 날이었어!

아침부터 부드러운 바람이 자꾸 엄마를 간지럼 태우 듯해서 종일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던 날이었지.


너도 그랬나 봐.

점심 먹은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봤는데 네가 바람이 불어오는 길목에 무릎을 세우고 가만히 앉아 있더라고. 그 뒷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찰칵-소리를 내는 바람에 놀랐지?

잠시 뒤돌아 보더니 너는 "엄마, 바람이 너무 좋아~."라고 말하고선 다시 그 자세로 한참을 앉아 있었지.

곧 너를 지난 바람이 나에게로 오는데 갑자기 뭉클했어. 옛 생각도 나고.

너의 등은 '힘들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안개 낀 것 같은 앞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어.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기억나지 않는 그때의 내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고.


엄마가 여섯 살 때였나? 깊은 산골에 있는 할머니 댁(너에겐 증조 외할머니)에서 혼자 지냈던 적이 있었거든. 그곳은 정말 집도 드문드문 있고 사람도 보기 힘든 곳이었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하러 나가시고 혼자서 심심했던 엄마는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는 게 하루 일과였지. 이쁜 그림을 그려도 봐줄 사람이 없어서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에 그림을 들고 서 있어도 봤는데, 다리가 아파올 때까지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거야. 저 멀리 높은 산만 엄마를 바라보고 있더라고. 무척 실망하고 속상해서인지 흐릿한 기억 속에도 그 장면은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아.

그래도 바람이 불던 날은 행복했던 것 같아. 계속 같은 자리에 있던 구름이 사라지기도 하고 가만히 있던 나뭇잎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게 신기했어. 바람이 하는 걸 알면서도 바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어느샌가 할머니가 오셔서 좋아하는 감자볶음도 해주시고 하셨거든. 아마 그때는 몰랐겠지만 바람이 함께 하는 순간 외롭지 않다고 느꼈던 게 아닐까? 적막만 흐르던 산골에서 혼자만 있는 기분이다가 바람이 살랑살랑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을 것 같아. 말하자면 엄마가 기억하는 엄마의 첫 친구였던 셈이지. :)


그 후 장소가 바뀌고 엄마의 모습도 변했지만 여전히 바람은 엄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어. 어느 날은 새로운 숨이 되어 주기도 했고 말이야. 그래서인지 바람이 좋은 날은 절로 기분이 좋아져. 오늘처럼 너와 내가 함께 한 날은 더 감동이기도 하고.


예전에 엄마가 회사 입사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사진을 배운 적이 있거든. 수업 첫날 선생님이 우리에게 질문을 하신 거야. 무엇을 찍고 싶어서 사진을 배우러 왔냐고 말이야. 순간 엄마는 당황했지. 그냥 일에 필요한 사진을 좀 더 잘 나오게, 멋있게 찍는 기술을 배우러 간 거였으니까. 근데 엄마 옆에 있던 분이 확고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대답을 하더라고. '바람을 찍고 싶다'라고. 바람을 찍으러 다닐 거라고.

어리고 맹했던 엄마는 그때 그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어. 장난하는 게 아닌가 하고 쳐다봤었으니까. 대답을 듣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흡족해하는 선생님의 표정도 이해가 안 갔었고 말이야.


근데, 살면서 가끔 그 말이 떠 올라.  

엄마도 가끔 바람을, 혹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 그분은 정말로 원했던 대로 바람을 담아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왠지 바람의 땅, 제주를 담아낸 김영갑 작가의 사진처럼 감동적이고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그러고 보면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위로를 얻고 감동을 받는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순간에도 말이야. 그때 엄마에게 사진을 지도해주시던 선생님도 그런 걸 가르쳐주시려 했던 게 아닐까 싶어.


내일도 또 오늘 같은 바람이 놀러 오면 좋겠다. 그렇지? 너에게도 바람은 왠지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 같아. :)


그럼, 오늘도 좋은 밤!



#3.

우리 자주 바람멍 하자!


세 번째 종이학을 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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