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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Aug 26. 2020

다행이야. 네가 내 딸이라서.

안녕?

꽤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 같아.

그동안 꺼내 놓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한동안 괜찮았던 오른쪽 어깨가 다시 아파오지 뭐야. 다행히 예전처럼 밤잠을 못 이룰 정도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괜찮아. 아마도.. 운동부족이겠지? 앗, 부끄럽다..! :)


오늘은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왔어. 어깨가 빠질 것 같은 통증 때문에 힘들지만 너를 실망시키고 아프게 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이 곳에라도 고해성사를 해야 할 것 같아.


며칠 전부터 엄마는 네가 나간다는 영어 말하기 대회가 신경이 쓰였어. 대회 준비는 하지 않고 빈둥대며 놀고 있는 너의 모습이 거슬려서 혼자 속이 타들어갔지. 어제는 내내 놀기만 하던 네가 전날 밤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있다며 모든 준비를 끝낸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그만 꾹꾹 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오고 말았던 거야.

여리고 결이 고운 너는 엄마에게 화도 못 내고 작은 목소리로 ‘칫, 엄마 미워!’ 라며 뾰로통해서 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지. 그때까지 엄마는 엄마니까 당연히 그런 객관적이고 냉정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네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은 채, 너의 동력을 멈추게 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야.


금방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던 너는 저녁이 될 때까지 네 방에서 나오지 않더라. 단단히 토라져서 나를 외면하는 걸 보니 갑자기 집이 텅 빈 것 같은 게 괜히 외할머니 생각이 나더라고. 혼자 식탁에 멍하니 앉아 있다 외할머니에게 문자를 보냈지. 코로나 때문에 갑갑하고 무료할 텐데 어떻게 지내냐고 말이야.

근데, 뭐라고 답이 왔는지 알아?

‘수학 공부도 해야 하는데 우선 영어만 해 본다. 심심할 틈이 없다'며 영어책 사진 두 장을 보내셨더라고. 순간 웃음이 나면서도 괜한 심술이 발동해서 '나는 심심해!’라고 다시 문자를 보냈어. 분명 '책이라도 읽던지 운동이라도 좀 하지'라고 답이 올 거라 예상하면서 말이야.

근데, 이런 답장이 왔어.

‘심심할 시간이 다 있고 푹 쉬어라. 너가 한가하다니 좋다. 쉬어가면서~'


순간,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지난 일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더라고.

글씨는 반듯하게 써야 한다고 네가 최선을 다 해 쓴 글씨를 지웠던 일, 다른 아이들은 손들고 발표도 잘하는 데 너는 왜 그러지를 못하냐고 했던 일. 분수와 나눗셈은 어려운 게 아니라며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하기를 바랐던 일 그리고 그런 너를 내내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본 일들 말이야.


5학년 때였지?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 잘 해낼 거라는 나의 기대와 달리, 어느새 넌 자존감 낮은 아이가 되어 있었지. 뭐든 자신 없어했고, 불안해하면서 강박적인 행동까지 보이는 네가 걱정이 돼서 담임 선생님께 상담 갔던 날이었어. 너를 아픈 아이로만 바라보는 내게 선생님은 그러셨어.


"어머님, 어머님이 그렇게 걱정되고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시면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아이는 지금, 너무나 잘하고 있어요."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은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삼킬 수가 없더라고.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지.

그 날 저녁 엄마는 복잡한 마음과 다급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정직함이 최선이다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냈지.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사실은 엄마도 잘 몰라서.. 너는 뭐든 당연히 엄마가 기대하는 만큼 잘할 거라고 생각했어.. 엄마가.. 너를 아프게 했다면 정말로.. 진심으로 미안해...’라고 말이야.

천 근이나 되는 돌덩이가 사라진 듯한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내게 너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어.

'아~ 엄마는 내가 영재인 줄 알아서 그랬던 거구나!'라고 말이야.

그때 반짝이는 네 눈이 얼마나 이쁘고 고맙던지.

누구보다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었을 텐데, 첫째라는 이유로 어른스럽게 행동하길 바란 내게 넌 해맑게 웃고 있었어.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며 친절하지만 차가운 엄마였던 내게 말이야.


어제 일도, 생각해 보면 얼마 전 학원 테스트에서 너만 떨어진 것이 속상했던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는 보란 듯이 좋은 결과를 내서 엄마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던 거지. 겉으로는 경험 삼아하는 거니 결과는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말이야.


엄마도 진짜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그렇지? 이번에는 다행히 외할머니 덕에 금방 알아챘지만 말이야.

만약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다면 진심으로 이렇게 말할 거야. ‘와~ 근사한데!’라고 말이야. 그니까 이번에 한 번만 더 봐주라~ 응?


내일은 너 좋아하는 시원~~ 한 오이냉국 만들어 줄게! 얼음 동동 띄워서 매콤한 떡볶이랑 같이 먹는 거 어때? O.K?!!


그럼, 믿는다! :)

우리모두, 오늘도 좋은 밤!



#4.

외할머니가 우리 곁에 오래오래 계셨으면 좋겠다.


네 번째 학을 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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