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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Aug 30. 2020

오롯이 넌, 네 거란다.

안녕?

오늘은 엄마가 수다 떠느라 너 학원 가는 것도 몰랐네. :) 너도 알지? 우리 시애틀 갔을 때 만났던 엄마 친구 희수 아줌마. 늘 에너지를 불어넣는 환한 미소를 가진 아라와 태우의 엄마 말이야. 엄마랑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나와서 1년간 함께 하숙도 했었지. 몇 마디 나누다 보니 금세 이십여 년 전 신촌의 하숙방에 나란히 누워 있는 기분이 들더라고. 훗-.


고등학교 선생님 근황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어설펐던 첫 연애 이야기에 까르르 넘어가다가 결혼, 육아, 직장 이야기까지 흘러갔지. 그러다 불쑥 엄마가 희수 아줌마가 너무 부러웠다는 말을 던진 거야. 묵혀뒀던 진심이 툭 튀어나오는 순간이었지.

대학 때 희수 아줌마는 ‘나는 한국 남자랑 결혼 안 할 거야.’라고 했는데, 진짜 몇 년 뒤에 미국인이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하지 뭐야. 그때 엄마는 놀란 마음에 바보처럼 축하한다는 말보다 ‘부모님이 허락하셨어?’라는 말이 먼저 나왔었던 것 같아. 딸 셋 중에 막내 사위 하나쯤은 외국에 살아도 괜찮다고 하셨다는 대답을 듣는데, 막 알을 깨고 나오는 새를 눈 앞에서 보는 기분이었어. 막내로 태어난 희수 아줌마가 부럽기도 했고.


맏딸로 태어난 엄마는 늘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부모님을 먼저 떠올렸거든.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들은 기억은 없지만, 맏딸로 태어난 엄마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오래전부터 각인이 되어 있는 기분이었어.


엄마가 어릴 때 ‘아들과 딸’이라는 주말연속극이 있었는데, 그 드라마에 나오는 집이 꼭 엄마 집 같더라고. 주인공으로 나온 귀남이는 네 외할아버지 같았고. 실제로 네 외할아버지는 위로 누나를 넷이나 두고 온갖 정성과 기도로 귀하게 얻은 아들이라 드라마 주인공만큼이나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대.


엄마가 열 살 즈음부터 너의 증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너의 외할머니는 전형적으로 순종적인 며느리였지. 부당하지만 당당한 시어머니의 요구나 태도에도 그저 말없이 순순히 따르고 받들었으니까. 옆에서 보고 있기엔 그 모습이 답답하고 속상했는데도 아들만 챙기는 것 같던 증조 외할머니가 엄마만은 유독 예뻐하시니까 엄마는 성별(性別)이 아닌 성씨(姓氏)가 다른 것에 대한 차별인가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 물론 나중에는 엄마가 남동생, 그러니까 너의 외삼촌을 볼 수 있게 좋은 길을 연 아이라 이뻐하셨다는 걸 알게 됐지만 말이야.


근데 딸인 너를 낳고 주변의 반응과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복잡해지더라고. 아직도 너를 그 시대의 딸로 대하고 네 동생과 차별하는 걸 보면서 한편으로는 나도 너에게 그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어. 나의 무의식 속에 있는 고정관념과 몸에 밴 관습이 너에게도 굴레가 되지 않을까 겁도 났고 말이야.


혹시 기억나니?

공놀이와 자동차를 좋아하는 너에게 엄마가 아주 어렵게 구한 발레복이라며 이제 발레 배우러 다니자고 했던 거 말이야. 넌 마지못해 발레복을 입어 보긴 했지만 발레학원 근처에는 갈 생각도 안 했어. 그런 너를 나는 결국 수개월 뒤 근처 문화센터 발레교실에 등록했었고 말이야. 그 뒤로도 너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을 내가 먼저 정해준 적이 많았던 것 같아.


재작년이었지?

반 친구들 대부분이 초경을 시작하자 너는 상기된 얼굴로 기대하는 표정이었어. 왠지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영역이라고 생각해 오던 엄마에겐 그런 네가 낯설고 당황스러웠지. 물론 너도 얼마 지나지 않아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초경이 시작되면 불편하고 힘들 것 같다며 못마땅하고 불만스러워했지만 말이야.


사실 그런 네게 소박한 초경파티를 해주기까지 엄마는 마음이 많이 복잡했단다. 엄마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실천해야 하는 게 민망하기도 했고 너무 유난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거든.

하지만 탯줄이 연결된 것처럼 여전히 내 안의 양분을 먹고 자라는 너를 보면서 용기를 내기로 결심한 거지. 우연히 알게 된 손경이 선생님 덕분에 불편하지만 외면했던 젠더 감수성을 키워야겠다고 말이야. 역차별이 아닌 주체적인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균형된 시각을 갖는 것 말이야.

덤으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던 엄마의 삶이 무지했던 젠더 감수성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는 게 슬프기도 했어.


하지만 알게 되었다고, 결심을 했다고 실천이 쉽진 않았어. 거의 사십 년 가까이 존재하던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걸러낸다는 게 여간 힘들지 않더라고. 우선 엄마의 삶부터 달라져야 했으니까 그동안 엄마를 알던 사람들이 엄마를 어떻게 볼까 신경도 쓰이더라고.

알을 깨고 나오긴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했어. 딸과 아들을 동시에 키우는 엄마가 균형점을 찾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든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 흔들리는 순간마다 여성이나 남성이 아닌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임을 끊임없이 생각했지.


그렇게 혼돈의 시기를 거치고 나니 지금은 많이 단단해지고 편안해지고 있는 것 같아. 너도 덩달아 내 눈엔 그렇게 보이고 말이야. :)


그러니까 우리 이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우리 안의 감정을 외면하지 말자. 잘못된 고정관념에 눈치 보지 말고 자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존재의 고마움을 알고 충분히 서로를 존중했는지, 부당한 것을 당연하다는 시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는 거지. 완벽한 합의나 완전한 평등은 어려울지 몰라도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은 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이야. 당연히 때로는 거절하고 미움받을 용기도 필요하겠지?!


엄마는 너희 둘 모두가 젠더 감수성이 풍부해서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다는 사이프러스 나무처럼 서로를 존중하면서 주체적으로 자랐으면 좋겠어.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삶보다 진짜 너희 안에 숨겨진 이야기로 꽃을 피우면서 말이야.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저마다의 모습으로 자라나 푸른 숲을 이룬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앗! 엄마가 오늘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가 길어졌네. 긴 편지 읽느라 눈 아프겠다.

그럼 오늘도, 우리 모두 좋은 밤!



#5.

인공지능 AI도 젠더 감수성이 필요하겠지..?!


다섯 번째 종이학을 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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