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이 잘 드는 아이였다.
부딪혀도 아픈지 모르고, 멍들었단 소리에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던 아이였다. 살갗 아래 고인 멍쯤은 애초에 치료하지 않는 거라 배웠다며,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들에게만 말을 거는 아이였다. 멍들지 않은 것처럼 사는 아이였다.
아이는 현재의 삶에 실망할수록 더 나은 미래를 그리며 위로했다. 부지런히, 성실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사는 삶으로 스스로를 격려했다. 자신이 발견한 행복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자만하기도 했다. 아이가 바라보는 세계는 아름다웠고 선함으로 출렁거렸다.
어느 날 아이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누군가의 손을 빌려 일어나기에 아이는 이미 어른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졌고 작은 실수에도 흔들렸다. 아이에게 삶의 시작과 끝을 보는 일이 반복됐다. 누군가의 죽음과 그것을 아파하는 사람을 동시에 보는 것을 버거워했다. 몸이 아파서 아픈 건지 마음이 아파서 아픈 건지, 멀쩡한데도 아파했고 무엇인지 모른 채 아파했다. 최선의 답만 있을 뿐인데도 정답이 없는 문제라며 아이는 괴로워했다.
오직 유명 역술가만이 지극히 평범한 아이의 삶을 위로했다. 그즈음이었다. 내가 그 아이를 만난 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떠돌이별처럼 중력을 잃어버린 아이. 홀로 서지 못한 채 세상에 나와 두려움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이제는 다 괜찮다는 그 말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그 아이의 취향을 존중하고, 그 아이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디로 걸어가고 싶은 지, 그 아이의 우주가 궁금해졌다.
시월은 나에게 언제나 시작하는 달이니까.
그리고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출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