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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Nov 30. 2020

집이라는 공간을 생각한다.

햇살 드는 창가에 앉아 새로 산 모눈종이 노트를 펼쳤다. 습관처럼 첫 장은 비워둔 채, 두 번째 장 오른쪽 아래에 연필로 선을 그려 면을 만들었다.

제일 먼저 그린 것은 차고였다. 오래된 아파트의 주차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기준점이 되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종이에 네모난 직사각형을 하나 그렸을 뿐인데 그 공간에서 행복해할 남편의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현관을 그리고 거실과 주방, 서재를 그려나갔다. 주인 없는 땅인 것처럼 뾰족한 연필이 슥슥 소리를 내며 공간을 만들어낼 때마다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학교 다닐 때 가정 시간에 배운 평면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지만, 그것이 전부라서 나는 행복했다.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실현이 가능한 구조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게 되자 나의 뇌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늘 효율성을 따지며 주어진 환경, 정해진 틀 안에 나를 맞추며 살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맞춤옷을 선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옷감을 고르고 재단하는 재단사처럼 나는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며 빈 공간을 신중하게 채워나갔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고, 담고 싶은, 나만의 시선을 담아내는 창을 그렸다. 현관에는 무엇이 있으면 좋을지, 앞마당에는 어떤 나무를 심을지, 뒷마당은 어떤 공간으로 꾸밀지를 고민하다 보니 끊임없이 남편과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연스레 그들의 관심사를 인정하고 취향을 존중하고 있는 내 모습이 잠시 겸연쩍기도 했다. 욕실의 위치, 서재의 테이블 하나까지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누군가가 생기지 않도록 각 공간마다 기억해야 할 것들을 꼼꼼히 기록했다.

다양한 음색의 악기가 조화롭게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누구도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종이 한 면을 가득 채웠다. 빼곡하게 그려진 종이를 내려다보니 당장 실현 가능한 일도 아닌데 꿈꾸던 여행지를 다녀온 듯한 뿌듯함이 차올랐다.


최근 티브이에는 집을 소개하고 집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주로 기성복처럼 지어진 아파트 생활을 떠나 자신만의 단독주택에 살게 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방송을 보고 있으면 집의 외관뿐 아니라 건축주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질 때가 많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수많은 땅 중 그곳에 자리 잡은 이유, 수많은 재료 중 특정한 재료를 고집한 이유, 서로 함께 살게 된 이유 등 그들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애틋함도 묻어났다.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에서 오늘의 일이 비롯됐다. 그들의 대부분은 집을 짓고 나서야 진정한 집의 의미를 찾았다고 했다. 그 말이 나에겐 '진짜 나'를 발견하고 삶의 방향을 찾았다는 말처럼 들려왔다. 어느 유명 건축가의 말처럼 집은 그 사람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몽상가여도 좋다. 다시 연필을 들고 다음 장을 펼쳐 2층을 그리기 시작했다. 1층과는 또 다른 공간들이 생겨났다.

나에게도 집은 육체가 머무는 자리, 그 이상을 의미했다. 때로는 치유가 되는 공간, 생각을 키우고 마음에 안식을 주는 공간, 소외됨 없이 모두가 어울려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는 공간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알아챘다. 작은 모눈 하나하나마다 평소에는 표현하지 못한 섬세한 마음이 들어차 있었다.

눈 앞에 이뤄질 현실은 아니지만 꿈도 아니었다. 미래를 담보로 희생해야 하는 현실은 더욱 아니었다. 나를 흔드는 유혹 앞에서 본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이정표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이 들여다보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엄마 다락방은 내가 쓸래. 접었다가 펼쳐서 올라가는 계단이면 좋겠다", "엄마 나는 무서워서 가운데 방이 내 방이면 좋겠어." "축구골대는 여기 두면 좋겠다." "우와 여기 앉아서 하늘 보면 좋겠다." 등등 미처 알지 못한 숨어있던 소리들이 경쾌하게 튀어나왔다.

우리 가족만의 연주가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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