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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May 10. 2020

우리는 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가...
<1>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1. 들어가며...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인생 자체에는 힘듦과 슬픔, 그와 더불어 행복과 안녕(安寧)이 내재하고 있지만 아주 많은 경우에,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과 안녕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인생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하는 법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역설적으로 삶이 너무나 고단하고 힘든 나머지, 아니면 자신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에만 몰두한 나머지, 우리는 그러한 힘듦, 고난, 역경의 '부조리함', 즉 우리는 왜 그토록 고된 삶을 '굳이'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망각하곤 한다. 어쩌면 이 질문이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 근본적인 질문인데도 말이다.


 이에 더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도대체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단순히 '자살하고 싶다.'라는 말과 동일시하여 그러한 생각이 나쁜 생각이라고, 누군가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을 측은하게, 그 사람이 어떠한 내적 문제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도, 내가 크게 어떠한 불행한 일을 겪은 것은 아니었지만 중학생 때부터 왜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면 왜 자살을 하면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곧잘 했었고 그렇게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남들도 다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떠한 계기로, 학원 선생님이 나의 그러한 생각을 알게 되셨을 때 당신 스스로는 내가 어떠한 문제를 겪고 있다고 여기시면서 진심 어린 위로의 말들을 해주신 것이겠지만 그때 당시 나는 그러한 위로에서 어떠한 진정한 울림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상투적인 말들로만 들렸으며 더욱이 자살을 생각하는 나 자신이 특이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더랬다.


 내가 방금 말한 저 선생님의 태도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자살'에 대한, 아니 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삶을 왜 사는지 모르겠기 때문에 삶을 그만두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태도일 것이다. 자살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나쁘고, 이상하고, 우울증과 연관시키는 바로 그러한 태도 말이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측면에서 보자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의 반대는 삶을 그만둔다는 것, 즉 자살인데, 그 누구도 삶을 왜 굳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커녕 진정한 물음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저 '살아가고' 있다. 네이버에 '자살하고 싶다'라고 검색을 하면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는 메시지와 매한가지로, 공허하고 상투적인 문구만이 있을 뿐이다.


 『시지프 신화』는 바로 위와 같은 물음, '삶은 도대체 왜 이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한 카뮈의 처절한 물음이자 카뮈 그 자신의 '인생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

2. 삶,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시지프 신화』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철학이라는 학문이 만약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이 세계의 근본적인 질문들, 예를 들어 인간의 인식이 도대체 어떠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선과 악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도대체 그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카뮈가 위와 같이 말한 것은 지극히 타당한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를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를 살아감으로 인해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살기 위해서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만약 누군가가 '살아있지 않다면' 그러한 질문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카뮈가 예로 든 니체와 더불어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토록 설파했던 것처럼 실천이 철학과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면, 이 세계를 살아갈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그 실천이 바로 삶이나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자살을 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 위와 같은 삶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그 자신이 만족할 수 있을만한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이기에, 삶이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표현으로서 자살을 감행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렇게 한 인간으로 하여금 삶이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이 들도록 하는,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의문이 들도록 하는 이 '빌어먹을'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해 카뮈는 '부조리'라고 칭한다.


 카뮈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부조리의 감정을 겪고 느낀다는 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1+1=2라는 것과 같은 성질의 명제이므로 이에 대해선 가타부타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그러한 부조리의 감정이 과연 한 인간에게 자살을 명하는 것인가, 아니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인가, 혹은 다른 명을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논의가 바로 '부조리의 추론'인 것이고 앞으로 전개해나갈 부조리의 추론에는 엄밀하고도 논리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3. 부조리란 절연(絶緣)이다

 '부조리'란 단어가, 그 울림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은 아마 '부조리'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비슷하리라. 부조리는 어딘가 뒤얽혀있는, 답답한,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숨 막히는 감정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그렇다. 내가 살아가면서 저 단어를 가장 많이 들은 시절은 아마 군대에 있을 시절일 것이다.


 대부분의 부대가 그랬겠지만, 휴가나 외출을 나가는 경우 우리는 소위 말하는 짬순으로 그 순서를 정했었다. 내가 사적으로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선임들과 휴가 계획이 겹치면 나는 그 날 휴가를 나갈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엔 그것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휴가는 엄연히 군대의 임무나 업무와 상관이 없을 터인데 선임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선권을 가져간다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더랬다. 자신의 휴가에 대한 시급성은 그 일이 가족여행과 같은 시급한 일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이고 휴가가 업무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적어도 나는 휴가 계획에 있어서만큼은 짬순의 원칙이 적용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후임병일 때 내가 선임병이 되면 시급한 일이 아니라면 휴가 계획은 가위바위보로 정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 내가 선임병이 되고 나서 우리 내무반은 무조건 가위바위보에 의해 휴가 계획을 짰다. 나는 적어도 나에게 그것이 올바르다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가 '부조리하다.'는 것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불합리하다, 논리적이지 않다.'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불합리하거나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면 △이다.'라고 하는 명제가 참이라고 한다면, '□이면 △가 아니다.'라는 사실은 당연히 거짓이어야 하지만 실제 세계를 들여다보니 □인데 △가 아닌 경우가 있다면, 이에 대해 우리는 불합리하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며, 더 자세히는 □이면 △가 아니거나(명제가 거짓, 즉 불합리하거나), □인데 △가 아닌 사실 자체가 불합리하거나, 어쩌면 이러한 명제나 세계를 판단하는 '나' 자체가 불합리한 존재일 것이다. 명제가 거짓인 경우라면 □와 △ 같은 명제를 이루는 논리항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 것이고, 명제가 거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제 세계가 거짓이라면 명제와 실제 세계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 것이고, '내'가 불합리한 것이라면 '나'의 인식과 이 세계나 명제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 것이다. 즉, 불합리하거나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는, 어떠한 두 요소 사이의 툭 하고 '끊어짐'을 의미하며 '부조리'란 이러한 '끊어짐', '절연'이다.

끊어짐(디즈니 애니메이션 『헤라클레스』 중에서)

 내가 방금까지는 '부조리란 절연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이는 사실 예비적 설명에 불과하며, 나는 물론이고 카뮈 또한 부조리를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밝힌다. 그가 배우를 수백 번 본다고 그 배우를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예를 드는 것과 똑같이, 부조리에 대한 묘사를 수백 번 한다고 해서  부조리에 대해서 명확한 인식을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묘사를 통해 부조리가 어떠한 감정이고 어떠한 느낌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가 나의 부조리에 대한 설명을 읽고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유명한 카뮈마저도 명확한 설명은 포기할 정도였고, 사르트르 또한 구토』에서 부조리에 대한 설명을 느낌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어쩌면 부조리란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기에 '부조리'일 것이다.


4. 부조리, '나'와 '세계' 사이의 끝없는 심연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그 무언가는 미래의 어떠한 목표를 위해서, 혹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학생의 경우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취준생은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예로 든 공부를 하는 학생이나 취준생이 아니더라도, 그들 또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고 또 직장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업무를 수행한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학생이나 백수라고 하더라도 그들 나름대로의 재미를 위해서,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게임을 하고 유튜브를 보고 브런치를 읽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기계적 일상 속에서의 단순하고도 찰나의 관심에서 바로 그들의 삶을 끝장낼 수도 있는 부조리가 시작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 속에서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게임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단순한 질문, 인터넷 용어를 빌리자면 '현자타임'이 찾아오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이고도, 대개의 경우 답이 없는 '내가 왜?'라는 질문이 바로 부조리에 대한 우리의 첫 대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첫 대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는 '이성', 더 자세히는 '자기반성적 의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부조리에 대한 첫 대면은 자기반성과 명철한 의식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부조리에 대한 첫 대면을 무시하지 않고, 즉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삶으로 돌아가지 못해 계속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라고 느낀 이들은 (니체가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예로 든)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처럼 부조리를 등에 매고 계속해서 전진해간다.


 그다음으로 마주치는 부조리의 감정은 바로 시간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는 보통 '나중에 무언가를 해야겠다.', '나중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라고 하는 미래 지향적인 성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그 미래를 위해 현재에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재는 암울하지만 미래에는 나아지겠지 뭐...'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저 윗 문단의 단순한 호기심과 같은 방식으로, '퍼뜩' 깨닫게 된다. 자신이 과거에 그토록 바랬던 내일, 미래가 바로 오늘이라는 현재이고, 자신이 현재에 바라고 있는, 기대하고 있는, 대비하고 있는 미래도 언젠가 자신에게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미래가 들이닥쳤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부지불식간에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시간이라는 축 위에서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성에 대한 의식'이며, 시간성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이는 자신이 '영원한 현재'에 갇혀 있다는 것을, '현재'를 의식하는 그 즉시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리며,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의 찰나의, 아니 '찰나'라는 수식어조차 너무나 큰, 바로 그 시간이 현재라는 것을, 이 현재라는 것은, 우리가 보는 선은 명확히 두께를 가지고 있지만 선이 두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기하학의 공리처럼, 우리가 있다고 여기지만 막상 실재하지 않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간성에 대한 의식은 그 끝을 실감하게 만드며, 그 끝이란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절대 현재를 살아갈 수 없으며, 누군가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미래를 대비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토록 바랬던 미래에는 결국 우리를 낚아채가려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공포로 미루어 보아 거기에 최악의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내일,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한 내일을. 이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부조리의 감정을 품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알아보자. 그것은 바로 '나', '너', 꽃, 모니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것, 세계에 대한 '낯섦'이다. 이 또한 앞서 설명한 두 가지 감정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에 대한 느낌이나 감정이 나로서는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수 있겠는데 이러한 낯섦을 가장 손쉽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의 단어를 소리 내어 계속해서 읽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복'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이라고 읽다 보면 이 행복이라는 글자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행복'이 행복이라고 쓰는 게 맞았었나?' 하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진 형상과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이 주는 막연한 낯섦과 더불어 사르트르가 말하는 구토, 답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밖에 나가 산책을 하다 보면 문득,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가, 잡초, 꽃, 건물들이 도대체 왜 그 자리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형상을 하게 된 것인지, 왜 지금 나의 앞에 있는 것인지와 같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물음이 생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설사 과학에서 말하는 이론을 들이대며, 산과 꽃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그러한 형상을 갖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부조리의 감정을 품은 인간의 '왜'라는 질문에는 과학은 절대 대답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꽃, 모니터와 같은 외부 물체에 대해 느끼는 낯섦이다.


과학은 기능을 설명할 뿐 존재를 설명하지는 않는다.(카뮈의 일기에서 발췌)


 '나' 자신에게서 느끼는 낯섦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한번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생각이 어떠한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생각을 해보려고 시도해보라. 나 자신의 '생각에 관한 생각'은 이를 실천에 옮기려 하는 즉시, '생각에 관한 생각에 관한 생각'을, 어지러움을 동반하면서 그러한 시도는 온통 물거품이 되어버리는데, 카뮈는 이를 고운 모래를 손에 쥐려고 하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얘기한다. 또한 이와 같은 인식론적 측면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 생각에 대해서, 그러한 생각, 감정을 느끼는 명확한 이유를 찾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혹여나 찾았다고 해도 그러한 이유가 자신을 단지 합리화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진실인지, 그 생각의 주체이자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한테서도 그 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나 자신에 대한 낯섦의 부조리의 감정은 거울과 거울을 마주 보게 하면 생기는 '무한반사'를 보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거울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이 거울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그 끝은 절대 알 수 없고, 이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는 '나'인데 정작 나 자신은 나를 볼 수도 그 속을 알 수도 없으며, 거울 속에 서있는 사내 혹은 여인은 한없이 낯설기만 하며, 그 무엇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거울을 응시하노라면 어딘가 섬뜩하고 어지러움이 느껴진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무한반사(영화 『인셉션』 중에서)

 부조리의 감정 중 마지막으로 '너'에 대한 낯섦을 살펴보도록 하자. 내가 탄 버스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문득 창밖의 어떤 여인들이 커피를 마시며 떠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어떤 말을 하고 있길래 저렇게 박장대소를 하는 것일까. 저 여인은 왜 살고 있는 것이며,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저러한 환한 표정 뒤에 어떠한 속마음을 숨기고 있을까. 아니, 속마음이 없이 단지 기계적으로, 그녀를 마주한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 위해서 웃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 생각 없이 정말 기계적으로 웃기니까 웃는 것일까. 생각의 끝에 다다라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창밖의 여인은 그 속을, 생각을, 감정을 알 수가 없기에,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웃는 표정, 그 미세한 주름, 떨림, 커지는 눈동자 밖에는 알 길이 없기에 그녀는, 내가 집에서 사용하는 컴퓨터와 같이 고도화된 기계와 같을지도 모른다고. 맞다. 나는 다른 사람을 도무지가 알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은 나에게 있어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물체와 다를 바가 없고, 단지 고도화된 기계에 불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타인에 대한 낯섦이다. 우리는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정말 티끌만이라도 알 수 없으며, 이러한 무지로 인해 그 사람이 나에게 있어 더 이상 나와 똑같은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카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들 역시 비인간적인 것을 분비한다.


 여태까지 설명한 감정들이 모두 부조리의 감정이고, 이러한 부조리의 감정은 결정적으로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의 관계에서 촉발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이라면 그 관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관계란, ''와 나의 생각, 감정, '너', 나를 둘러싼 외부의 모든 물체, 즉 '세계' 사이의 무한한 심연이며 이 심연이 바로, 부조리다. 이 부조리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기는 이 세계와의 관계, 비장한 대결이며, 이 부조리는 달리 설명하자면 의식을 가진 인간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위의 문단별로 각각 '왜 살지?', '어차피 끝은 죽음인데 왜 살아야 하지?', '저 물체는 도대체 뭘까?', '내가 정말 ~라고 생각하는 걸까?',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을 던지지만 이 세계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부조리의 감정을 밀어붙인 인간에게는 더 이상 사랑이 무엇인지, 닭이 먼전지 달걀이 먼전지, 공산주의가 실현 가능한 것인지, 미국의 주식시장은 앞으로도 꾸준히 오를 것인지, 올해 승진을 할 수 있을 것인지 하는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 사람은 자신이 부조리의 감정을 느끼기 전의 자신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


나 자신에 대해 ,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해 이방인인 나, 긍정하는 즉시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사고만을 유일한 구원 수단으로 갖춘 나, 이런 내가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알기를 거부하고 살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 조건, 정복의 욕구가 공격을 조롱하는 벽에 부딪치고 마는 이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부에서 계속.(https://brunch.co.kr/@macather099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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