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그 무언가는 미래의 어떠한 목표를 위해서, 혹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학생의 경우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취준생은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예로 든 공부를 하는 학생이나 취준생이 아니더라도, 그들 또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고 또 직장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업무를 수행한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학생이나 백수라고 하더라도 그들 나름대로의 재미를 위해서,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게임을 하고 유튜브를 보고 브런치를 읽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기계적 일상 속에서의 단순하고도 찰나의 관심에서 바로 그들의 삶을 끝장낼 수도 있는 부조리가 시작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 속에서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게임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단순한 질문, 인터넷 용어를 빌리자면 '현자타임'이 찾아오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이고도, 대개의 경우 답이 없는 '내가 왜?'라는 질문이 바로 부조리에 대한 우리의 첫 대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첫 대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는 '이성', 더 자세히는 '자기반성적 의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부조리에 대한 첫 대면은 자기반성과 명철한 의식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부조리에 대한 첫 대면을 무시하지 않고, 즉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삶으로 돌아가지 못해 계속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라고 느낀 이들은 (니체가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예로 든)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처럼 부조리를 등에 매고 계속해서 전진해간다.
그다음으로 마주치는 부조리의 감정은 바로 시간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는 보통 '나중에 무언가를 해야겠다.', '나중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라고 하는 미래 지향적인 성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그 미래를 위해 현재에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재는 암울하지만 미래에는 나아지겠지 뭐...'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저 윗 문단의 단순한 호기심과 같은 방식으로, '퍼뜩' 깨닫게 된다. 자신이 과거에 그토록 바랬던 내일, 미래가 바로 오늘이라는 현재이고, 자신이 현재에 바라고 있는, 기대하고 있는, 대비하고 있는 미래도 언젠가 자신에게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미래가 들이닥쳤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부지불식간에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시간이라는 축 위에서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성에 대한 의식'이며, 시간성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이는 자신이 '영원한 현재'에 갇혀 있다는 것을, '현재'를 의식하는 그 즉시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리며,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의 찰나의, 아니 '찰나'라는 수식어조차 너무나 큰, 바로 그 시간이 현재라는 것을, 이 현재라는 것은, 우리가 보는 선은 명확히 두께를 가지고 있지만 선이 두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기하학의 공리처럼, 우리가 있다고 여기지만 막상 실재하지 않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간성에 대한 의식은 그 끝을 실감하게 만드며, 그 끝이란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절대 현재를 살아갈 수 없으며, 누군가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미래를 대비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토록 바랬던 미래에는 결국 우리를 낚아채가려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공포로 미루어 보아 거기에 최악의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내일,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한 내일을. 이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부조리의 감정을 품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알아보자. 그것은 바로 '나', '너', 꽃, 모니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것, 세계에 대한 '낯섦'이다. 이 또한 앞서 설명한 두 가지 감정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에 대한 느낌이나 감정이 나로서는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수 있겠는데 이러한 낯섦을 가장 손쉽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의 단어를 소리 내어 계속해서 읽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복'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이라고 읽다 보면 이 행복이라는 글자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행복'이 행복이라고 쓰는 게 맞았었나?' 하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진 형상과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이 주는 막연한 낯섦과 더불어 사르트르가 말하는 구토, 답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밖에 나가 산책을 하다 보면 문득,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가, 잡초, 꽃, 건물들이 도대체 왜 그 자리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형상을 하게 된 것인지, 왜 지금 나의 앞에 있는 것인지와 같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물음이 생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설사 과학에서 말하는 이론을 들이대며, 산과 꽃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그러한 형상을 갖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부조리의 감정을 품은 인간의 '왜'라는 질문에는 과학은 절대 대답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꽃, 모니터와 같은 외부 물체에 대해 느끼는 낯섦이다.
과학은 기능을 설명할 뿐 존재를 설명하지는 않는다.(카뮈의 일기에서 발췌)
'나' 자신에게서 느끼는 낯섦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한번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생각이 어떠한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생각을 해보려고 시도해보라. 나 자신의 '생각에 관한 생각'은 이를 실천에 옮기려 하는 즉시, '생각에 관한 생각에 관한 생각'을, 어지러움을 동반하면서 그러한 시도는 온통 물거품이 되어버리는데, 카뮈는 이를 고운 모래를 손에 쥐려고 하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얘기한다. 또한 이와 같은 인식론적 측면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 생각에 대해서, 그러한 생각, 감정을 느끼는 명확한 이유를 찾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혹여나 찾았다고 해도 그러한 이유가 자신을 단지 합리화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진실인지, 그 생각의 주체이자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한테서도 그 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나 자신에 대한 낯섦의 부조리의 감정은 거울과 거울을 마주 보게 하면 생기는 '무한반사'를 보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거울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이 거울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그 끝은 절대 알 수 없고, 이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는 '나'인데 정작 나 자신은 나를 볼 수도 그 속을 알 수도 없으며, 거울 속에 서있는 사내 혹은 여인은 한없이 낯설기만 하며, 그 무엇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거울을 응시하노라면 어딘가 섬뜩하고 어지러움이 느껴진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부조리의 감정 중 마지막으로 '너'에 대한 낯섦을 살펴보도록 하자. 내가 탄 버스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문득 창밖의 어떤 여인들이 커피를 마시며 떠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어떤 말을 하고 있길래 저렇게 박장대소를 하는 것일까. 저 여인은 왜 살고 있는 것이며,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저러한 환한 표정 뒤에 어떠한 속마음을 숨기고 있을까. 아니, 속마음이 없이 단지 기계적으로, 그녀를 마주한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 위해서 웃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 생각 없이 정말 기계적으로 웃기니까 웃는 것일까. 생각의 끝에 다다라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창밖의 여인은 그 속을, 생각을, 감정을 알 수가 없기에,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웃는 표정, 그 미세한 주름, 떨림, 커지는 눈동자 밖에는 알 길이 없기에 그녀는, 내가 집에서 사용하는 컴퓨터와 같이 고도화된 기계와 같을지도 모른다고. 맞다. 나는 다른 사람을 도무지가 알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은 나에게 있어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물체와 다를 바가 없고, 단지 고도화된 기계에 불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타인에 대한 낯섦이다. 우리는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정말 티끌만이라도 알 수 없으며, 이러한 무지로 인해 그 사람이 나에게 있어 더 이상 나와 똑같은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카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들 역시 비인간적인 것을 분비한다.
여태까지 설명한 감정들이 모두 부조리의 감정이고, 이러한 부조리의 감정은 결정적으로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의 관계에서 촉발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이라면 그 관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관계란, '나'와 나의 생각, 감정, '너', 나를 둘러싼 외부의 모든 물체, 즉 '세계' 사이의 무한한 심연이며 이 심연이 바로, 부조리다. 이 부조리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기는 이 세계와의 관계, 비장한 대결이며, 이 부조리는 달리 설명하자면 의식을 가진 인간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위의 문단별로 각각 '왜 살지?', '어차피 끝은 죽음인데 왜 살아야 하지?', '저 물체는 도대체 뭘까?', '내가 정말 ~라고 생각하는 걸까?',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을 던지지만 이 세계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부조리의 감정을 밀어붙인 인간에게는 더 이상 사랑이 무엇인지, 닭이 먼전지 달걀이 먼전지, 공산주의가 실현 가능한 것인지, 미국의 주식시장은 앞으로도 꾸준히 오를 것인지, 올해 승진을 할 수 있을 것인지 하는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 사람은 자신이 부조리의 감정을 느끼기 전의 자신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
나 자신에 대해 ,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해 이방인인 나, 긍정하는 즉시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사고만을 유일한 구원 수단으로 갖춘 나, 이런 내가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알기를 거부하고 살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 조건, 정복의 욕구가 공격을 조롱하는 벽에 부딪치고 마는 이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부에서 계속.(https://brunch.co.kr/@macather099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