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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Jan 27. 2020

SEX라는 신화의 붕괴에 관하여...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를 읽고...

 참 오랜만에 읽은 '현대'소설이다. 아마 지인이 추천해준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비밀』 이후로 1990년대 이후 소설은 『소립자』 가 처음인 것 같다. 누군가는 이렇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이자 공감을 더 절실히 할 수 있는 현대인이 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고 옛 고전, 구체적으로는 1970년대까지의 책만을 읽으려 하는 것에 대해서 '홍대병', '중2병'에 걸렸다고, 허세를 부린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1990년대 이후의 책들은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말마따나 시간의 검증(좋은 책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언제까지나 도서관이나 서점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시험)을 아직 통과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와 같이 『소립자』가 아직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립자』 자체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한 번쯤 글을 써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다른 글에서와는 다르게 이 글에서만큼은,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치밀한 해석은 하지 않을 것이고 주로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할 생각이다. 이 글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이며, 또한 다소 성적인 묘사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힌다.


1. 세 신화의 붕괴

 서구 사회를 지탱했던 신화는 세 가지가 있다. '종교', '도덕', 성별과 성 그 자체를 모두 포함하는'SEX'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신화는 서구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신화였지만, 인류의 역사가 1800년대와 1900년대의 시기를 거치면서 모두 붕괴되었다. 종교와 도덕의 붕괴에 대해서는 일전의 글에서도 상세히 설명이 되어 있기에 이 글에서는 이 두 신화의 붕괴에 대해서는 이 단락에서 간단히 요약해보고자 한다.


  니체는 1800년대까지 인류가 쌓아올린 도덕이라는 탑을 허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선악의 저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의 저서에서 인간의 도덕이란 것이 그저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서로 지켜야 할 율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도덕, 율법들은 사자가 싸워서 이겨야 할 '용(dragon)'으로 묘사되고 있다. 니체는 인간이란 이러한 율법들과 맞서 싸워 마침내 율법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아기'와 같은 상태를 추구해야 할 존재로 보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종교의 붕괴를 소설로 가장 잘 나타낸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실한 신자이기도 했던 도스토옙스키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소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삶이 너무나 고독하고 힘든 것으로 보나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나 신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중세의 암흑시대를 보나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격정의 근대시대를 보나 인류 역사에는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학살과 신이 있다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고, 인간이 그러한 불행을 겪을 때 신은 천사를 보내거나 구원을 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들이 거듭되면서 마침내 니체와 같은 철학자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것이며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신이 죽어버린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우려를 소설로서 표현한 것이었다.

독실한 신자이자 도박꾼, 도스토옙스키

 이러한 종교와 도덕의 붕괴가 이루어진 직후인 1900년대 초반은 공산주의자들과, 사드와 같은 극단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에게는 찬란한 시대의 서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니체가 그토록 뼈아프게 슬퍼했던, 그리고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악령』에서 말했던 불길한 기운이 드리우고 있었고, 이러한 니체와 도스토옙스키의 예견은 양(兩)차대전,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대학살로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된다. 1900년을 전후로 도덕과 종교라는 신화를 잃어버린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었고 그에 따라 인간은 전쟁과 학살이라는 너무나 참담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2. SEX의 붕괴

 기존에는 SEX도 종교나 도덕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입장에서, SEX가 하나의 생명을 잉태한다는 측면에서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SEX 역시도 종교와 도덕과 마찬가지로 붕괴되었는데 단지 앞서 말한 종교와 도덕과는 다르게 SEX라는 신화는 상대적으로 저 둘에 비해 늦은 시점에 붕괴되었다.  SEX의 붕괴 시점은 과학적으로는 콘돔의 대중화, 형이상학적으로는 프랑스에서 1968년 5월에 일어난 68혁명을 들 수 있다. 68혁명은 그 명칭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가히 '혁명'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철학, 문화, 정치적으로 수많은 영향을 낳은 사회운동으로, 68혁명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8혁명 당시 시위대가 주장한 것들은 수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중에는 양차대전을 겪고 프랑스의 재건을 일궈낸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 그리고 무엇보다 성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당시 사회에 대한 불만이 내포되어 있었다.

68혁명을 그린 영화 『몽상가들』의 명장면

 SEX의 붕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콘돔의 대중화와 68혁명으로 들 수 있는데,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섹스와 출산을 분리시켜준다는 데에 있다. 콘돔은 sex를 함으로써 생식이 이루어지지 않게 해주는 하나의 물리적 도구라고 할 수 있고, 68혁명은 '섹스가 꼭 출산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라는 명제의 당위성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SEX의 붕괴로 당시의 68세대와 그 자손들로 하여금 이전 세대가 보기에는 방탕하다고 볼 수 있을만한 성적 자유가 허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SEX의 붕괴는 68세대가 갈망했던 성적 자유에 그치지 않고 도덕과 종교의 붕괴로 양차대전이 발발한 것처럼 인간에게 재앙을 또다시 불러일으키게 된다.


3. 억압으로서의 SEX

 SEX라는 신화의 붕괴는 긍정적으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작게는 여대생 기숙사의 남학생들의 출입허용, 크게는 동성연애 허용 등의 성적 자유를 부여하여 인간 자유의 지평을 한 단계 넓히긴 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성적 자유를 하나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이용했고 이를 위해 인간의 성욕을 무차별적으로 증대시키기에 이르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욕에 대한 자극은 도처에 깔려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광고이다. 심지어 외모와 관계가 없는 제품들의 광고에서조차 그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성적으로 매력을 가질 수 있다는 어필을 하기도 한다. 또한 TV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얼굴이 당대의 유행에 맞게 잘생겼거나, 몸매가 뛰어나다. 그러한 인물들이 출연하는 TV를 보면 거울 속의 개개인은 한없이 초라해지며, 완벽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이성(동성애자들에게는 동성)을 보고 있노라면, 그 이성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박탈감이 들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현대 자본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광고들에서는 이렇게 외모적으로, 아니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성적으로 매력 있는 인물들 자체가 노출되기도 하고, 광고 속의 제품을 구입함으로써 구매자가 성적으로 매력 있어질 수 있다고 현대인들을 유혹한다.

sex marketing, Calvin Klein 광고

 더 나아가 이러한 SEX의 붕괴 및 그로 인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욕에 대한 자극은 이전에 존재했었던, 이성이든 동성이든 각자 개개인을 연결하던 '사랑'의 의미마저 퇴색되게 만들기에 이른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사랑의 의미를 퇴색했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단지 sex를 하고 싶다는 단순한 성욕의 감정,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물질에 대한 탐욕과 같은 종류의 속물적인 욕망에서 나오는 감정으로 격하시켰다고, 혹은 욕망이라는 그 감정 자체로 격하시켰다는 데에 있다.


 그 누구에게, 심지어 그가 저명한 철학자인 플라톤, 칸트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과연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질문에 누구나 공감할만한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이토록 이해하기 어렵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행하기 어려우며, 그 누구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르기에 받기도 어려운 사랑에 대해 그 의미를 섹스로 대표되는 성욕의 감정, 자신의 외연에 집착하는 욕구, 누군가가 자신에게 얼마만큼 큰 물질적 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단순한 욕망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여태까지 설명한 광고에서의 섹스 마케팅과 사랑의 단순한 욕망으로의 전락은 Dior 광고에서 나탈리 포트만에 대한 육감적 묘사,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묻는 "What would you do for love?"의 대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DIOR 광고

 이와 같은 현대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성욕의 증대와 부추김, 사랑에 대한 단순한 욕구로의 환원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며, 이러한 (이전까지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조차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경쟁은 필연적으로 더 좋고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제품에의 물욕, 내면이 아닌 외연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태까지 설명한 섹스에 대한 욕구불만과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섹스를 하지 못한 상대적 박탈감,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하고 또 자유로워진 성적인 욕구에 피해를 입은 인물들은 책에서 각각 브뤼노와 아나벨로 나타나고 있다. 브뤼노의 경우 성기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몸매도, 얼굴도, 그리고 성생활을 잘할 수 있는 능력도 없는, 한마디로 성적인 매력이 전혀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브뤼노는 또래의 남학생들이 성적 자유를 만끽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한 포르노를 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는 섹스를 하지 못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하며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사회의 풍토로 인해 이러한 고통은 더욱 악화되어 간다. 하지만 그 자신도 어느새 자신을 한평생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가벼운 관계, 성욕에 매몰되어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었던 관계에 대해서도 이를 책임지지 않고 끝끝내 다른 여성에 대한 추구로 포기하게 되며, 그 포기로 인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던 여인은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나벨의 경우, 반대로 그 자신은 매우 아름답고 성적인 매력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평생 동안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성욕으로 가득한 남자를 만나 낙태를 두 번이나 경험한 뒤 마침내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나 얼마 뒤 자궁암이 발견되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살을 하게 된다.


4. '소립자'화

『소립자』의 주인공 미셸, 그의 이복형인 브뤼노, 아나벨은 모두 SEX라는 신화의 붕괴로 인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브뤼노의 경우 성욕의 증대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그 자신이 피폐해졌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아나벨은 그녀가 살던 시대의 여느 사람들과 같이 성욕을 무조건적으로 추구하는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수동적인 태도로 인해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잇따른 낙태와 ('SEX의 붕괴'라는 이데올로기에 맞게) 출산을 하지 않은 대가로(자궁암의 경우 출산을 하지 않으면 발병률이 올라간다고 한다.) 병에 걸려 자살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반면 미셸의 경우 브뤼노처럼 격정적인 욕망에 휩쓸리지도 않았고, 아나벨과 같은 어떠한 병마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겪은 고통이 어찌 보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이 겪을만한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원자화, 아니 책의 제목에 걸맞게 '소립자'화가 바로 그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도덕과 종교의 붕괴가 인간 사회를 거시적 관점에서 와해시켜놨다면 세 번째 신화인 SEX라는 신화의 붕괴는 조금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의 관계를 마치 무한한 거리를 두고 우주에 홀로 외로이 존재하는 소립자들처럼 와해시켰다. 성욕의 증대와 부추김은, 개인으로 하여금 다른 개인을 그저 성욕의 배출 수단으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그 개인이 품고 있는 형이상학적 가능성이나 자질들을 모두 퇴색시켜버린 뒤 외연만을 보도록 강요하였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단지 단순한 성욕, 욕구라는 감정으로 환원하여 사랑이 불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각 개인이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소립자화 되는, B급 포르노와 천박한 광고만이 가득하게 된 서구 사회의 진정한 '몰락'을 꼬집은 작품이 바로 『소립자』이며, 그 제목이 바로 왜 '소립자'인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5. 무성생식

 만약 누군가가 외형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해 반박할 생각은 없으며, 오히려 그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외연적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에서 더 나아가 여태까지 밝힌 것과 같이 현대사회는 SEX에 대해서도 상품화를 함으로써 개개인을 소립자화 시켰고 도덕과 종교의 붕괴가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이 이 거룩한 땅을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붕괴시켜 끝없고 고독한 우주로 내팽개쳐버렸다.


 일전에 썼던 도덕과 종교의 붕괴에 관한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SEX의 붕괴에 대한 해결책, 아니 미봉책도 비슷한 결론을 내야 할 듯싶다. 바로 자신을 둘러싼, 자신과 똑같이 고독한 우주를 살아가고 있는 타인에 대한 연민, 책에 나오는 용어로 말하자면 '형제애'가 바로 그것이다.


 아나벨의 죽음에 슬퍼했던 미셸은 연구를 거듭했고 미셸의 연구에 힘입어 인류는 마침내 유성생식이 아닌 무성생식으로 신인류를 창조하게 된다. 그리고 신인류들은 일란성쌍둥이가 동일한 유전 형질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격을 키워가는 것처럼 형제애로 똘똘 뭉쳐 각자의 인격을 개성에 맞게 키워나가게 된다. 이러한 결론은 물론 과학적으로 볼 때에 동일한 유전 형질을 가지고 있으면 비슷한 인격을 가지게 될 확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작가는 인류의 무성생식이라는 다소 기발한 발상을 통하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류가 SEX라는 신화의 붕괴에 '형제애', 타인에 대한 연민을 통해 맞서 싸우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6. 결론

 1863년 마네가 그렸던 <올랭피아>는 그 주인공이 매춘부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이전의 화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신이 아닌 일반 여자가 천 쪼가리도 걸치지 않은 체 나체로 있다는 측면에서 성적으로 파격적인, 당대인의 기준에서는 매우 천박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올랭피아>라는 그림이 전연 파격적으로 보이지도, 천박하게 보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가 저 <올랭피아>라는 그림에 대해 천박하다고 느꼈던 1800년대를 살아가던 근대인들에게 편협한 사고를 지녔다고, 당시의 보수적인 성관념에 대해서 욕할 수 있을까? 오히려 SEX 그 자체를 신성하다고 여겼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수한 어린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며 느끼는 경외감과 같이 한 번쯤 생각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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