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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May 10. 2020

우리는 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가...
<2>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1부에서 이어집니다.(https://brunch.co.kr/@macather0998/11)>

5. '철학적 자살'과 '자살'

  여기까지 온 우리에게 "인간은 그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너무나 나이브(naive)한 질문이 되어버렸다. 저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부조리의 귀결은 과연 자살일까?" 즉 앞서 설명한 암울한 상황들을 비추어보노라면  부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이 절에서는 자살이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가 있는지, 그리고 자살이 그 해결책이 아니라면 다른 어떠한 것이 과연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부조리의 해결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카뮈는 논의에 앞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후로 인류가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았던 이성에 대한 반동적 사유, 이성에 대한 제동이 부조리라고 말하며, 이러한 이성에 반하는 부조리에 대한 감정, 사유는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고 설명한다. 카뮈는 그러한 인물들로 야스퍼스,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셰스토프, 현상학자 등을 예로 들기도 한다. 나는 사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려는 시도를 여러 번이나 해봤지만 매번 실패했던 만큼 카뮈가 예로 든 야스퍼스,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등의 사상에 대해 논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하지만 카뮈조차도 자신이 그들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고 말하며 언급은 했으므로, 나도 감히 내가 카뮈의 말을 이해한 대로 짧은 식견으로나마 여기서 언급을 하려 한다.

이성에 대한 '의심'(<도마의 의심>, 카라바조)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은 내가 4절에서 얘기했던, 카뮈가 부조리의 감정에 대해 묘사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관심'이란 4절에서 얘기한 '외부세계에 대한 낯섦'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기계적 일상을 살 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어떠한 사물에 대해, 예를 들어 내가 브런치를 쓰기 위해서 보고 있는 모니터의 '존재'를 의식할 때, 이 모니터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어떻게 저러한 형태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관심'이다. 이러한 '관심'은 인간, 즉 '존재자'로 하여금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식하도록 만들고 존재자는 마침내 자신의 존재의 끝인 '죽음'을 깨닫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을 '불안'에 빠져들도록 하며 하이데거의 그 유명한 표현대로 "세계는 불안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불안은 존재자로 하여금 그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를 충만할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를 온 힘을 다해 느낄 수 있도록 하며 불안에 사로잡히기 이전의 존재자 자신과는 다르게 존재자가 이 세상을 자기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무명의 존재 속에서 길을 잃고 있던 상태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라.(하이데거)

 

 야스퍼스와 셰스토프는 인간의 합리주의라는 것이, 이성이라는 것이 항상 난관에 부딪힌다고 말하며 후설을 비롯한 현상학자들 역시 인간이 이성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알 수는 없고 다만, 인간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그 현상을 보다 더 자세히,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해나갈 뿐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야스퍼스, 셰스토프, 후설은 앞서 언급한 '나 자신에 대한 낯섦'과 같은 인간 자신의 의식에 대한 불합리함, 부조리함을 논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저 위대한 사상가들의 입을 빌어 자신이 설파하고 있는 부조리의 정당성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카뮈는 부조리와 맞닿아 있는 바로 그들의 사상이 부조리에 대한 도피, 바로 '철학적 자살'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철학적 자살의 첫 번째 예는 야스퍼스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의 이성을 이용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얘기한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행위일 뿐이며 이 세계에는 이성을 이용해서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는 부조리의 추론에서 말하는 그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작된다. 야스퍼스는 이성이 해결하지 못하는, 이성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들, 즉 부조리에 대해 '이것이 바로 신(神)이다.'라고 자신 있게 손가락을 쳐들며, 부조리 자체를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절대적 존재로 승화시키게 된다. 더욱이 야스퍼스는 부조리라는 '신'을 더욱더 찬양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인간에게 있어 유일한 무기인 이성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데 온 노력을 치중한다. 이러한 부조리를 신격화하고 이성이라는 성(城)을 함락시키려는 시도는, 부조리가 합리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인간과, 질문에 침묵하는 세계(즉 신과 같은 일체의 형이상학적 존재를 전연 상정할 수 없는 세계) 사이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부조리 그 자체를 신격화했기 때문에 카뮈의 입장에선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예는 러시아의 철학자 셰스토프로, 카뮈는 그가 이성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고, 이러한 모순에 대한 인간의 처절하고도 슬픈, 니체적인 반항에 주목했다는 측면에서는 부조리의 추론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반항에 멈추지 않고 그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나머지 인간이 가진 이성은 헛된 것이며 오직 참다운 것이 불합리, 부조리뿐이라고 말한다. (셰스토프에게 무척이나 고맙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이 글에서 인간이 가진 이성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이성을 통해서는 그 무엇도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오로지 이성을 폄하한다는 인상을 받은 이가 있다면 이 문단을 빌어 정정하고 싶다. 인간에게 있어 이성은 축복과 재앙이라는 양면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앞서 카뮈의 입을 빌려 말한 것처럼 이성은 어떠한 외부 물체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존재의 작용원리, 다른 존재와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측면에서 인간이 가진 이성은 축복이며 인간이 부조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이성에 의해서, 외부 물체 간의 상호작용, 작용원리에 대한 궁금증을 뛰어넘어 그 존재 자체에 대한 궁금증,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 이성이 가진 비극적 측면이다. 즉 정리하자면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며 고로 이성은 부조리가 있기 위한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을 셰스토프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부조리의 선결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성에 대한 너무나 무자비한 폭격을 한 나머지 이성 그 자체와 이성으로 인해 생기는 인간의 물음은 온 데 간데없고 오로지 부조리만이 남게 된다. 카뮈는 이러한 이성과 인간의 궁금증이 선결되지 않는 셰스토프의 '부조리'는 비약이며, 그가 그토록 주장했던 반항, 투쟁은 먼지와 같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다음 글귀는 카뮈가 이성에 대해, 셰스토프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셰스토프가 볼 때 이성은 헛된 것이지만 그래도 이성 너머에 무엇인가가 있다.
부조리의 정신이 볼 때 이성은 헛된 것이고 이성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셰스토프와 야스퍼스 외에도 키에르케고르, 후설의 철학 등 실존철학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이들이 결국에는 철학적 자살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철학적 자살에 대해 모두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이들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으므로 이에 대한 해석은 나중에 내가 그들의 사상을 알게 된다면, 혹은 이 글을 읽는 이가 직접 카뮈가 그들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한 것인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직접 책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고 결국 카뮈가 이 절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이다. 바로 실존철학자들이 '나'와 세계 사이의 대결인 부조리에 대하여 내가 가진 이성을 없애버림으로써, 혹은 관계 그 자체인 부조리를 신격화함으로써 부조리를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철학적 자살의 기저에 깔려있는 의식이란, 부조리 그 자체가 명철한 의식, 이성에 의하여 발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무시한 '비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약은 내가 이 글의 초두에 언급한 것처럼 부조리의 추론에서는 일관된 논리적 태도가 요구된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그 자체로 부조리의 추론에선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온 우리에게 있어 인간의 통일에 대한 향수, 이 세계에 대한 의미부여, 예를 들어 이 세계는 사랑으로 충만하다든지, 이 세계에는 신이 있어 신이 의미를 부여해준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비약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즉,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명철한 의식에 비추어 볼 때 일체의 형이상학적 논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그 유명한 철학자들의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들조차 '철학적 자살'이라는 도피에 불과하다고 단정한 우리에게 남은 부조리에 대한 유일한 해결의 가능성은 자살, 육체적 자살이다. 아마 내가 지금부터 말할 자살에 대한 논의는 여태까지 글을 읽은, 명철한 이라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카뮈는 그의 책 전반에 걸쳐 부조리에 대하여 의식을 가진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하여 이 세계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 세계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 세계가 어떠한 일체의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이 세계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인지 묻고 이에 대해 침묵을 하는 세계로 인해, 인간과 세계 사이의 끝없는 심연으로 인해 생겨나는 대결, 관계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카뮈는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나-(부조리)-세계의 삼위일체가 부조리라고 하며 인간과 세계 중 어느 항이 사라져도 부조리는 사라지게 된다고 얘기한다. 육체적 자살은 바로 이러한 두 항의 관계에서 '나'를 없애버리는 것이기에 부조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를, 문제 자체를 폐기해 버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이 절을 시작하면서, 글을 시작하면서 했던 질문, 즉 '부조리의 귀결은 자살일까?'에 대한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되겠다. 이러한 대답, 부조리는 자살을 명하지 않는다는, 삶이 고난할지라도 억지로라도 살아야 한다는 이 대답은 단순하게 보자면 이 글의, 시지프 신화』의 결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살은 부조리 자체를 폐기해버리는 것이기에 답이 될 수 없다.'라는 결론은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고, 우리에게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겨둔다. 다음 절에서는 부조리의 세 가지 귀결에 대해서 논하도록 하겠다.


6. 반항, 자유 그리고 열정

 의식을 가진 인간은 부조리를 깨닫게 되었고 부조리의 추론을 통해 부조리를 타파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에게 있어 유일한 선택이란 바로 부조리를 계속해서 응시하고, 느끼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인생을 살아갈 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카뮈는 '자살자'의 반대가 '사형수'라고, 부조리를 응시하여 인생의 끝인 죽음을 의식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형수'의 반대가 '자살자'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부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고, 부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삶이, 이 세계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자살이나 자살을 행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부조리를 끌어안고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반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반항이 부조리의 첫 번째 귀결이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부조리로 인해 무의미했던 인간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필멸이라는 운명에 위대함을 부여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육체적 자살과 철학적 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생을 살면서 '부조리'를 직시하지 않는 무반성적 의식, 무의식에 빠져들면 안 되는 것이며, 부조리만이, 부조리에 맞서는 '반항'만이 인생을 살아가는 참다운 태도이자 보잘것없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에 항상 부조리를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삶이 무의미하다, 이 세계는 나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부조리에 대한 생각이 '반항'이라는, 인간의 유일하고도 위대한 운명으로 전환되는 카뮈의 사상은 데카르트가, 니체가 인류에게 던져주었던 충격과 비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조리의 두 번째 귀결은 '자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원리라고도 할 수 있는 대량생산체제라는 커다란 기계의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겉으로는 인간적인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미명 하에) 기초적인 생산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교육을 받고, 20대가 되어서는 일찍이 취업을 하는 이도 있고, 누구나 꿈꾸는 안락한 삶을 누리려 더 전문성을 키우기 위하여 공부를 하여 취직을 하며, 취직을 한다는 것은 산업의 진정한 역군, 즉 사회가 돌아갈 수 있는 기능을 한 가지 담당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취업을 한 뒤 자신이 그토록 꿈꾸었던 미래가 된 현재에 환멸을 느끼게 되더라도, 자신이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더라도 이미 그 사람은 한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가족의, 자식의 안락함을 위해 자신의 취미, 꿈은 접어둔 채 하루하루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고난의 세월을 살고 나면 남는 것이란 오랜 세월 고난한 삶을 겪은 몸의 후유증과 죽음을 앞둔 슬픈 황혼뿐이다. 과연 현대사회의 이러한 삶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일까.

 

 부조리를 느낀, 더 정확히는 죽음이 미래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안 인간에게는 더 이상 이러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 사회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아버지', '어머니', '직장인'과 같은 역할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원한 현재'라는 감옥에 살고 있다. 아니,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은 그것이 필경 하나의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에게 있어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은 미래도, 과거도 아닌 현재와 언젠가 자신을 질질 끌고 가게 될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영원한 현재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은 거짓 환상에 불과하다. 또한 이 세상은 어떠한 형이상학적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기에, 이 세상에서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어떠한 물체도 자신에게 어떠한 유의미한 것을 가져다줄 수 없기에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에게 이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 나아가 종교와 같은 형이상학적 의무란 더 이상 무의미하다. 즉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에게, 자세히 말하자면 죽음을 깨닫고 어떠한 형이상학적 비약도 거부하는 인간에게 있어 현재란 자신의 존재를 충만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이며, 그 순간부터 현재는 '내'가 여행을 온 이방인과 같이 무한한 자유를 지니고 향유할 수 있는 로도스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느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 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하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위와 같은 '자유'에서 부조리의 마지막 귀결인 '열정'이 파생된다. 일체의 형이상학적인 것을 부정하고 죽음이 자신에게 닥칠 것을 안 인간에게 부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최대한' 많이 살라고 명한다.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사회가 정한 규칙, 형이상학적 가치가 중요하지 않은 인간에게 이 세계에서 자신이 행하는 일들, 일어나는 사건들의 옳고 그름, 즉 가치척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러한 사건들의 사실관계만이 인간에게 중요해질 뿐이며 그러한 사실관계들에 대하여 인생을 최대한 많이 살면서, 최대한 많이 겪고 고찰해가면서 삶에 있어서의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부조리는 우리에게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외부세계와의 사건들이 무의미하다고 가르치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사건들이 똑같이 무의미하기에, 부조리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하여 통찰력을 지니게 위해서라도, 그리고 또한 어떠한 물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환상을 벗겨내고 그 물체를 바라볼 수 있기에 아이와 같은 순수한 열정으로 사소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라도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에 대한 반항, 자유, 열정을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잘 실천해나가는 '부조리한 인간'으로 돈 후안, 배우, 정복자들을 예로 든다. 돈 후안은 쉴 틈 없이 한 여자에게서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가는데 이는 그가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이기에, 현실과 형이하학적 육체만이 참다운 진리인 것을 알기에 자신의 육체적 열정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인간이고, 배우의 경우 돈 후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육체 하나로 다른 수많은 삶을 연기해내겠다는, 자신을 남김없이 소진하겠다는 '양의 윤리'를 실천하는 인간이며, 마지막으로 정복자의 경우 자신이 언젠가는 패배할 것이라는, 자신이 늙어 죽어 패배하든, 자신의 투쟁 과정에서 패배하든 영원한 승리는 없으리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끊임없이 투쟁해나가면서 카뮈가 말하는 열정에 찬 반항을 몸소 실천해나간다.


이상이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했던 부조리에 대한 추론의 세 가지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의식, 이 세계는 우리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다면서 시작한 부조리의 추론이 이제 다시 삶에 반항이라는 의미를 불어넣어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 많이 살도록,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삶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삶에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부조리를 느끼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할 것이며 다시금 절망에 빠져들 때도 있을 것이다. 마치 정상까지 굴려 올린 돌을 다시 주우러 갈 때의 행복했던 시지프가 다시금 돌을 정상에 올려야 할 때 깨달을 괴로움처럼 말이다.


7. 시지프 신화

 시지프는 우연히 최고신 유피테르(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을 겁탈하려 납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아소포스에게 일러바친다. 이에 노한 유피테르는 시지프에게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내나 이를 모두 예상한 시지프는 자신을 잡으러 온 타나토스를 자신의 집에 감금하게 된다. 타나토스가 시지프에 의하여 붙잡힌 뒤 이 세상에 죽음이 없어지자 자신의 왕국이 휑해진 지옥의 신 플루톤(하데스)은 유피테르에게 항의하였고 유피테르는 전쟁의 신 마르스(아레스)를 급파해 시지프를 지옥으로 데려오게 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아내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시험해보기 위하여 아내에게 장례를 치르지 말고 광장 한복판에 자신의 시신을 버리라고 하였고 아내는 이를 말 그대로 실천하여 격노한 시지프는 플루톤에게 아내를 벌하기 위해 지상으로 다녀오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한다. 플루톤의 허락을 맡고 지상으로 올라온 시지프는 플루톤을 비롯한 신들의 무수한 소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가 늙어 죽을 때까지 지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시지프의 불경(經)에 격노한 신들은 시지프로 하여금 영원히 산 정상에 돌을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내용이 시지프 신화의 내용이다. 시지프는 신에 대한 반항(유피테르의 납치를 일러바침), 죽음에 대한 경멸(타나토스를 가둠), 삶에 대한 열정(지상에 와서 눌러앉음)으로 인해 산 정상에 돌을 영원히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부조리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거부, 죽음에 대한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또한 부조리가 삶에 대한 열정을 가르친다는 측면에서 시지프가 저 세 가지 잘못에 대한 대가로 저러한 반복되고 무가치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신화에서의 놀랍고도 신비한 비유가 바로 우리가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성경, 수많은 신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카뮈는 이러한 신화에서 시지프가 받은 형벌의 의미를 고찰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산 정상에 돌을 올려다 놓은 뒤, 굴러 떨어지는, 그 자체로 무겁고도 고단한, 그러나 무의미한 돌덩이를 보면서 하산(下山)할 시지프를 그리면서 시지프 신화』를 집필한 것이다. 또한 그는 돌덩이를 다시 굴리려고 하산할 시지프가 자신의 돌덩이를 보면서 느낄 그 고통에 주목하여 그러한 고통을 알면서도 또다시 돌덩이를 굴리려 하는 시지프가 시지프에게 그러한 형벌을 내린 그 어느 신보다도 우월하다고, 시지프의, 아니 전 인간의 숙명에 신보다도 우월한 위대함이 있다고 시지프 신화』를 집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뮈는 자신에게 남은 유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역설적으로 신들이 아닌 자신이 이 형벌의 주인공이기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를 둘러싼 전 우주를 경외시 하는 마음으로 감상하며 나지막이 'Es ist gut(그것으로 좋다, 칸트의 유언이라고 전해진다.)!'라고 속삭이는 행복한 시지프를 그리며 시지프 신화』를 집필했을 것이다.

 

8. 맺음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부조리와 불합리로 점철되어 있다. 오히려 합리적인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운 세상이다. 돈을 만들어내기 위해 빚을 내야 하는 경제시스템(지불준비제도), 한 개체가 살아가기 위해 다른 개체를 죽여야 하는 약육강식의 법칙,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정당이 대리 게임 전적이 있는 후보를 공천하는 것,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 금수저와 흙수저, 책을 좋아하는 동시에 그보다 더 게임을 좋아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보기엔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불합리나 부조리를 꼭 해결해야 한다고, 해결 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철학을 좋아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 싶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삶에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악행들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카뮈조차도 절친했던 사르트르와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알제리 독립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불합리하게 행동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나'와 이 세계의 불합리 덩어리 속에서 우리는 카뮈가 말하는 것처럼, 그러한 불합리나 부조리에 대한 응시를 멈추지 않고 반항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유의미한, 이 무의미와 부조리의 바다인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책, 영화, 예술 작품을 통틀어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시지프 신화』에 대한 글을 쓴 것이 뿌듯하면서도 혹여나 카뮈의 진위를 곡해했을지, 아직 많이 부족한 나로서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카뮈의 『페스트』가, 카뮈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보면서 카뮈의 인생론이자, 카뮈의 전 작품에 깔려있는 의식을 엿볼 수 있는시지프 신화』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었고, 조만간 시지프 신화』의 의식들이 드러나 있는 『이방인』, 그리고 시지프 신화』의 속편 격인 『반항하는 인간』과, 그의 소설 격인 『페스트』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와 반항에 대한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하는, 영화 <조조 래빗>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도 한 릴케의 시구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Let everything happen to you Beauty and Terror
Just keep going. No feeling is final.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일어나게 둬라.
그냥 나아가라. 어떤 감정도 끝이 아니다.
<안개 위의 방랑자>,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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