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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Nov 05. 2021

무사고 사회를 넘어 성찰과 반성의 사회로

 얼마 전 오랜만에 정말 좋은 글을 봤더랬다.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대정신' 혹은 '이념'의 부재를 꼬집는 글이었는데, 나의 생각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였기에 인상 깊게 읽은 글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 대학교 시절의 자료가 필요하여 그때 당시 사용하였던 이메일을 들추다 보니 어떤 공모전에 제출했던 글을 발견하였다. 그 글에서도 방금 말한 좋은 글과 완전히 생각이 같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회의 '사상의 부재'를 꼬집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군대에서 책을 질리도록 읽고 나의 사상이 어느 정도 정립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쓴,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처녀작' 같은 글이었고, 그 당시에는 글을 다 쓴 뒤에 학교 선배에게 보여주면서 나의 생각이 정말로 맞지 않냐고 설득을 하기도 했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지금 다시 보니 나는 5년 전 이 글을 쓴 나에게 숙연한, 부끄러운 감정이 든다. 그 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일들이 있었던 것인지, 지금은 이 글에서 꼬집는 인본주의적 사상과는 거리가 멀게 된 것 같다.  아니, 그 5년의 시간을 탓하는 것도 결국 '남 탓'을 하는 것이리라.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해도 과거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평소 나는 나의 앞선 글들에서 말했던 니체의 '허무주의'적 행위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더욱 그러한 생각이 여실히 느껴진다. 또한 이와 같이 나 자신에 대한 응시에서 나오는 놀라움에 더하여, 이 사회가 그 5년 전에 비해서 더욱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을, 나에게 있어 처녀작과 같은 글을 5년이 지난 지금 브런치에 올리는 이유이다.


 오타 두 글자 외에는 수정하지 않았다. 5년 전의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도 있고, 논리적 비약, 비문 등을 쓰기도 하고, 현실적인 제언을 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는, 지금의 나와는 다르게 조금은 더 '바람직한 존재'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진 않겠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5년 전의 사회보다 더 발전한 모습이 아닌, 오히려 더욱 천박하게 바뀐 이 사회를 만든 책임이 조금은 있다고 느끼면서 나와 같은 숙연함, 부끄러움을 느끼길 바란다.


1.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이념을 중심으로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행복한 한국사회’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먼저 대한민국 사회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를, 또한 그러한 길을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걸어왔는지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한국사회’를 생각하는데 필수적이라 생각된다.


 새로운 사회가 태동하기 시작하는 근대부터 짚어보도록 하자.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우리 사회는 아주 큰 시련을 맞이한다. 신사 참배 강요, 일본어 사용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토지조사사업, 수탈 등으로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며, 또한 강제징용, 위안부 등 우리 민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민족해방’이라는 당시 우리 사회의 이념은, 민족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애국계몽운동’, ‘조선국권회복운동’, 또한 일본의 식민지 경제정책에 대항하기 위한 ‘국채보상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의 경제자립운동, 마지막으로 군사적 정치적 독립운동단체들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독립군’의 설립으로 표출된다. 결국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당시 우리 사회의 이념은 실현된다.


 하지만 얼마 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에 따라 당시 우리 사회의 이념은 ‘반공주의’로 설정된다. 1953년, 전쟁은 휴전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전후 경제회복의 문제가 시급하게 되어 다시 ‘경제발전’이라는 이념이 대한민국 사회의 주된 이념이 된다. 전후 완전히 붕괴된 우리 경제체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정부 주도의 경제 정책과, 이에 따른 공업발전, 외부적으로는 세계경제 호황에 힘입어 가히 ‘한강의 기적’이라 할 수 있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현대사회는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민주화’라는 이념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승만의 독재에 대항한 4·19 혁명, 5·16 군사정변과 12·12 사태 등의 독재체제에 대항한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는 민주주의를 확립한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이념들은 ‘민족 해방’, ‘반공’, ‘경제발전’, ‘민주화’로 요약된다. 그리고 위의 글만 본다면 대한민국 사회는 위의 이념들을 토대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것처럼 보인다.


2.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

  대한민국 사회는 실제로 단기간에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경제 침체, 사회 구성원 간 분열 등 사회 전반적으로 문제가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 또한 위의 과거 대한민국 사회의 이념을 통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민족해방’의 이념부터 살펴보자. 한일관계를 따져 보면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대한민국 사회와 일본 사회는 각각 반일 감정과 반한 감정이 극심한 상태이다. 해방으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은 식민지 감정, 일본은 제국주의적 행태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은 차치하더라도 무조건적인 반일감정은 오히려 대한민국 사회가 과거의 그 식민지 경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오히려 대한민국 사회가 ‘일본’이라는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서 민족주의적 행태를 점점 표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민족주의가 발전할수록 점점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이미 나치 독일에서 깨달은 바가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그토록 뜨거웠던 국민의 열기를 단지 좋게만 볼 수는 없는 이유이다.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세계의 지역블록화가 진행되는 지금, 동북아의 대한민국, 일본, 중국은 각각 ‘민족해방’, ‘제국주의’, ‘패권주의’라는 이념에 갇혀 과거의 문제뿐만 아니라, 현재의 공존과 협력을 등한시하고,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과거의 ‘민족해방’이라는 이념이 ‘민족주의’로 발전하고 점점 더 ‘전체주의’로 발전할 소지를 다분히 지니고 있으며, 이는 동북아의 주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과 그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는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 강제징용이나 강제징집으로 아직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혹은 타국에서 죽은 그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특히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들이 충분히 수용할만한 원만한 합의를 한일 양국은 보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를 통해서도 매우 가슴 아픈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위의 피해자들을 실질적으로 보듬어 안지 못하고 있고, ‘반일감정’, ‘한민족’, ‘치욕의 역사’라고 말로만 표방하며 이 ‘민족해방’의 이념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태도는 ‘반공주의’ 이념을 통해서도 한국사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과거 대한민국 사회에서 ‘반공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주의를 향한 열망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사회적 이념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 60, 70년대 ‘반공주의’가 세계적으로도 ‘매카시즘’이라는 형태로 정치적 선전에 활용되었다는 점도 사실이다. 이렇게 ‘반공주의’ 이념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레드 콤플렉스’로까지 발전하여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들은 일부 사회현상에 대해서 냉정한 시선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사회에 ‘자유’가 아닌 ‘구속’과 ‘감시’라는 뿌리 깊은 폐단을 낳게 되었다. ‘반공주의’ 이념은 자유주의를 향한 열망에서 나온 이념이었지만,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빨갱이’와 같이) 정치적 흑백논리를 위한 용어로서 사용될 뿐이다.


 ‘경제발전’ 이념의 실현은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산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 또한 경제문제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경제체제는 그 발전과정상 수출에 기반을 둔 대외 의존적 성격을 지니며 세계경제상황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에 잠재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경제발전은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균형 있는 발전이 아닌 불균형 발전이었다. 물론 전후 경제복구를 위해서는 정부 주도하에 집중된 투자·유치를 통해 조금이라도 빨리 성장한 뒤, 그 성장으로 사회적 이익이 퍼져나가는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는 동시에 경제적 소외계층이 생겨났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이 구절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구절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처럼 경제적 소외계층이 생김과 동시에 대한민국 사회에는 ‘재벌’이라는 개념도 생겼다. ‘재벌’은 영어단어에서 ‘chaebol’로 번역된다. 그만큼 다른 국가에서는 ‘재벌’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며 우리나라 특유의, 경제발전과정에서 생긴 기형적인 현상이다. 경제발전은 재벌과 같이 누군가에게는 ‘천국으로의 계단’이었지만, 위의 구절에서처럼 누군가에게는 낭떠러지이기도 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 노동자의 권리신장을 외친 전태일 등 경제적 소외계층뿐만 아니라 머나먼 이국땅에서 외환을 벌어왔던 해외파견 노동자, 대한민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사지로 내몰린 월남 파병용사들은 경제발전과 함께 따라다니는 ‘유령’이다.


 혹자는 “경제 소외계층이 발전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고, ‘공리주의’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의 경제발전은 매우 합당한 것이었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말은 두 가지 매우 좋지 않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로, 과연 그 경제발전과정상의 피해자들에게 ‘공리주의’라는 이유를 들이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둘째로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대한민국 사회가 분명히 경제발전의 수혜로 이렇게 높은 질적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맞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여전히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특성상 ‘경제성장’이 사회체제의 본질이며, 사회의 주된 목표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렇게 ‘경제발전’만을 추구한 결과, 대한민국 사회는 대기업의 과도한 투자로 인한 90년대 후반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게 되었고, 구조조정, 비정규직 확산, 강대국의 이익에 맞는 경제구조 개편, 양극화 등의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70, 80년대의 경제성장은 비교적 소수의 사회 구성원들만이 그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IMF사태로 현재 피해를 입은 그 수많은, 극소수의 상류층 구성원을 제외한 모든 국민에 대해서도 ‘공리주의’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대한민국 사회는 IMF사태마저도 잘 극복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는 이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며, 공익광고 등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IMF사태를 불러온(전 세계적으로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불러온)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 기조에는 변함이 없고 이는 현재 사회적 이슈인 경제문제의 본질적 원인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사회는 IMF사태에서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아직도 ‘경제성장’이라는 이념에 갇혀 양극화 문제, 내수경제 활성화 등의 ‘분배’에 관한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민주화’라는 이념으로 결집해 치열한 투쟁으로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민주주의’란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사상을 공평하게, 투명하게, 참정권이라는 형태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체제를 뜻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사회 구성원 간의 존중과 협력이 필요하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념 및 사상은 모두 존중받아야 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 구성원 각자 자신에게만 치중되어 타인을 비난하고 외면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다. 더 나아가 이제는 대한민국 사회가 ‘민주화’와 같은 어떠한 이념으로 결집하는 것이 아닌 정치적 파벌이나 지역이라는 형태로 결집하여, 무조건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매우 편협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너’와 ‘나’라는 차이의 관점이 아니라 ‘적’과 ‘아군’으로 나뉘어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네 개의 이념을 통해서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저 네 개의 이념은 처음에는 정말 순수한,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설정된 이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이념들은 모두 진정한 의미를 퇴색했으며, 그리고 오히려 대한민국 사회를 오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예로 저 네 가지 이념들이 대한민국 사회를 전체주의적 성향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과거의 저 이념들이 아닌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이념들을 절실히 탐구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대한민국 사회가 어떠한 이념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간다는 것이 그것이다. 위의 이념들을 대한민국 사회가 “우리는 이렇게 힘든 일들을 해냈다!”며 자부심에 차서 아무런 반성 없이 아직까지도 맹종(盲從)한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게다가 대한민국 사회는 이러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새로운 이념은 바로 ‘성찰과 반성’이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 사회에는 성찰과 반성이 없는 것인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3. 무사고(無思考) 사회

 대한민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생각이 없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무반성적으로 달리기만, 즉 ‘살다’의 수동적 의미로 ‘살아가기만’ 한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무의식적으로나마 “먹고살기도 힘들다”며 자위하고 있는 듯하다. 이 “먹고살기도 힘들다”라는 대답에 대해 고찰해보도록 하자.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이 대답이 어쩌면 정말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청소년기부터 입시경쟁, 성인이 되어서는 취업경쟁, 취업을 하고 나서도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 사회는 그야말로 ‘무한경쟁사회’이다. 경쟁에서 지면 도태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기에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마치 경주마들이 앞만 보도록 눈가리개를 하는 것처럼 주변을 되돌아보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채찍질한다. 더욱이 이런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사회에서는 자본이 하나의 권력, 혹은 사회적 목표로 자리 잡게 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은 자본으로 인한 소외감을 느끼며, 현재의 성찰은 없고, 자신의 현재에 대한 푸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 느낄 뿐이다.


 이 현상의 결과는 대한민국 사회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위축되는 문사철학과,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예술분야, 예술을 향유하는 데 있어서 사상의 부재, 부모의 재력에 따라 ‘계급’을 나누는 신조어 ‘금수저, 흙수저’, 늘어나는 청년 자살자, 어떠한 이슈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다수의 논리에만 따라 생각하는 ‘부화뇌동’적 행태  등등은 대한민국 사회가 점점 자본에 매몰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의 한 공장에서는 생산시설 내 전등의 밝기에 따른 생산성에 대해 연구를 한 적이 있다. 연구결과는 아주 기이하게 나타났다. 전등의 밝기에 따라서는 거의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지만, 연구를 진행하기 전과 비교하여 생산성이 월등히 향상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 공장 생산직 직원들은 연구자가 연구를 하러 현장에 있는 동안 자신들이 어떠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연구기간 동안 생산성이 향상되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분명 먹고살기 힘든 사회인 것 은 맞다. 하지만 개개인은 사회적 상황에 매몰되어, 자아를 잃어버리고 그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고 불행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동시에 ‘먹고살기도 힘들다’며 자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고차원적인 사상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이 아무리 풍요롭고 편한 생활을 하더라도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인간의 삶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둡기만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구성원 개개인은 이런 상황에 대해 자신만은 도태되지 않을 것이라며, ‘헬조선’이라는 혼잣말을 되풀이하면서 자조하며, 자본에만 치중하며 ‘사고하기’를 멈췄다. ‘사고의 진보’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 지금, 옛 이념을 현재까지도 맹종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사고하기’를 멈추어도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개개인이 결합한 사회는 그리 생명력 있는, ‘역동’적인 사회는 아닐 것이며, 우리 사회가 현재 그런 사회라고 생각된다.


4. 사고하기

 ‘사고하기’는 인문분야의 여러 학문과 관련이 매우 깊은 바, 그중에서도 철학이 ‘이념’과 가장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철학’은 세 가지의 질문으로 압축될 수 있다. ‘나는 누구일까?’, ‘너는 누구일까?’, ‘나를 둘러싼 이 세계는 무어인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의 질문이 ‘성찰’이며, ‘생각하기’의 기본이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철학자들이다. 사람들은 보통 ‘철학’을 떠올리면 아주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렵다는 사실 자체는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렵다’는 말이 어떠한 비상한 능력을 요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다만 저 세 가지 질문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들이며, 각자가 치열한 고민 끝에 각자의 답을 내놓아야 하는 질문들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저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알 수 있으며, 위에서 말한 ‘살아가는’이라는 수동적 의미의 삶이 아니라 ‘산다’는 능동적 자세를 가질 수 있다.


 개개인뿐만 아니라 어떤 학문을 탐구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이 인간의 삶에서 그 토대를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어떤 학문이든 그 토대를 이루고 있다. 학문의 발달을 살펴보면, 그 초기에는 학문의 근본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이 발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발달하고, 그 학문의 근본에 대한 반성을 해보면, 그 학문을 이루고 있는 토대가 인간을 오도한다고 깨달을 때가 있다. 그 반성이 아주 많이 일어났던 시기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이다. 물론 반성을 통해, 어떤 학문이 뿌리째 흔들리는 그런 불쾌한 심정이 들더라도, 이러한 뼈를 깎는 아픔을 통해 학문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고, 인간도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 학문의 탐구뿐만 아니라 학문의 이용에도 철학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학문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경제를 예로 들어보자.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경제성장이라는 요소에 의해 유지된다. 이는 화폐가치가 없는 것들을 화폐가치가 있는 ‘상품’으로 끊임없이 창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전환과정이 자본주의의 ‘진수’라고 혹자는 말한다. ‘물, 공기’와 같은 공공재들은 이미 많이 상품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더 나아가 ‘성(性)’, ‘미(美)’, ‘생명’ 등과 같이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들이 상품화된다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성을 사고파는 행위가 이루어지고, 심지어 외국에서는 대한민국까지 찾아와 ‘원정 성형수술’을 한다. 또한 잘 팔리는 개들을 기르려고 아주 비위생적인 공장에 개들을 가두고 새끼만 낳도록 하는 사건도 최근 밝혀졌다. 바로 이 과정에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 사회가 자본에 매몰되어 가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철학적 물음은 없으며, 당연히 이에 대한 해결책도 내놓지 않는다. 이외에도 대한민국 사회에는 철학적 통찰이 필요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누군가는 ‘이념’이나 ‘철학’ 같은 것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즉 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논리로 불식시킬 수 있다. 이념을 가진다는 것은 사상을 가진다는 것이며, 이념과 사상은 반성에서 나온다.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이념을 가지며 그를 실생활에 투영한다는 점에서 이념의 확립은 ‘형이하학적’이다. 그래야만 한 사람의 삶, 더 나아가 대한민국 사회는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삶이 더욱더 윤택해질 수 있다.


 이로써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의 원인을 조명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보자.


5. 물질 중심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로

 대한민국 사회는 현재, 전반적으로 너무나 물질적인 것에 치우쳐있다. 즉, 구체적인 사회현상을 꼬집어보자면 어렸을 때부터 입시, 취업 등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교육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가 아닌 사회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행해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은 가장 큰 시험이라 할 수 있는 ‘수능’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이라 함은 각 과목별로 그 과목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한 개인이 얼마만큼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판가름하는 시험이어야 한다. 하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교육이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시험 점수를 어떻게 해야 잘 맞을 수 있는가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동시에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어떠한 생각할 여지도 제공하지 않는다. 입시에 대한 교육,  어떠한 과목에 대한 사실만을 가르치는 그런 조야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입시 후 대학교 교육에서조차 이와 같은 문제점은 더 심화된다. 대학교는 학문이 태동하는, 어떤 학문에서의 새로운 사실이나 사상이 탐구되는 학문의 ‘요람’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대학교는 취업학원일 뿐이다. 대학생들은 대학교에서 어떠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취업을 해서 사회에서 기능을 다하기 위해 교육을 받으며, 대학교에서조차 그런 수업 방향을 추구한다.


 교육의 본질은 한 개인이 사회에 나아가기에 앞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이념이라는 기준점을 확립하고, 또한 그 기준점을 확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는 데에 있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학교에서는 정답만을 추구하는 교육을 지양해야 한다. 각자의 생각에 있어서는 ‘옳고, 그르다.’라고 하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이는 학교에서부터 자신만의 생각을 확립하려고 노력하고, 이를 상대방과 교류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나가는 그런 습관을 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습관은 토론문화를 통해서 가장 쉽게 정착시킬 수 있다. 이미 토론은 학교에서 흔히들 이루어지고 있지만, ‘보여주기’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토론을 주재하는 학교와 학생들도 정말로 진지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학기별로 어떤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학생기록부에 명시하는 그런 실효성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교사의 경우도 학생한테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조금이라도 학생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야 한다.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도 인문학에 대한 활동이 성행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처우는 정말 형편없는 수준이다. 기술 공모전, 아이디어 공모전, 디자인 공모전 등은 취업을 위해서 활발한 참여를 하지만, 인문학에 관해서만큼은 그런 활발한 참여도 없을뿐더러, 참여를 할 수 있는 루트가 많지 않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인문학 관련 학회, 단체를 지원하여 이런 사회적 활동을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흔히 말하는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인문학 열풍이 정말로 진지한 탐구욕에서 나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바, 수단으로써의 역할로 그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재 서점에 시판되는 인문학 관련 책의 추세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넓고 얕은 지식’, 유명한 철학자의 말들을 단편적으로 담은 책들은 어떠한 진지한 통찰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입시, 취업 등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수단으로써의 인문학 탐구는 오히려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고, 더욱이 자신이 책을 읽고 온전히 나의 생각으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답습할 뿐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책과 관련하여서도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있는, 번역이 이루어진 책이 많이 없는 것도 문제이다. 물론 ‘고전’이라고 하는 너무나 유명한 채들은 번역이 이루어졌고, 개정판이 나오긴 하지만, ‘고전’ 중에서도 수많은 책이 아직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 문제 또한 정부차원에서 학계에 지원을 점차 늘려나가 해결할 수 있겠다.


 문사철학과의 폐지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이다. 문사철학과의 특성상 취업률이나 경제발전 등의 가시적인 성과물을 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학문의 토대를, 더 나아가 어떤 학문을 어떤 자세로 탐구해야 하는지 제시하는 학문 또한 문사철학과다. 단기적인 시각으로 당장 성과물이 안 나온다고 해서 폐과를 하면 대한민국 사회는 점차 비가시적인, 즉 인간에게 있어 본질적인 가치들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당국도 더 이상은 대학이 문사철학과를 폐과 하지 않도록 규제방안이나, 재정지원 등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6. 인간에게의 본질적 가치와 행복한 사회

 마지막으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행복한 사회’란 대체 무엇일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대답하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비물질적인 측면에서는 ‘행복한 사회’가 형형색색의 꽃들로 이루어진 ‘꽃밭’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색깔이 어우러진 꽃밭에서는 우리는 어느 꽃이 다른 꽃에 비해 아름답다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그 모습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행복한 사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이념, 사상, 더 나아가 삶의 이유와 목적을 탐색하고, 그 목적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을 지원하는 사회가 바로 ‘행복한 사회’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그리 행복한 사회는 아닐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은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사회는 이렇다 할 지원을 못해주고 있을뿐더러, ‘남성과 여성’, ‘우파와 좌파’, ‘경상도와 전라도’등등으로 분열해서 서로 비난하며 헐뜯는 사회는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이 없이 획일화된 대한민국 사회를 형형색색의 꽃밭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여태까지 제기한 문제들은 정말 어떠한 매우 어려운 노력을 기울여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 글에서 고찰해본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들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 개개인이 일상생활에서 조금만 더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즉, 사회가 아무리 각박하고 힘들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또는 과연 무엇이 바람직한 길이지 생각하는 등의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그렇게 바뀔 때에야 대한민국 사회는 비로소 ‘민족해방’, ‘반공주의’, ‘경제발전’, ‘민주화’ 등 구시대의 이념을 뛰어넘어, 진정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이념을 추구하고, 실현해 과거 대한민국 사회가 그러했듯이 눈부신 발전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각박하다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에게 경종을 울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삶의 모든 1분이, 삶의 모든 순간이 인간에겐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합니다. 꼭 그래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무인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율법입니다. 숨겨져 있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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