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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Jan 05. 2022

『서양미술사』를 읽고...

미술에 대한 단상

 나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미술과 관련된 책을 또렷이 기억한다. 지금은 절판된, 나의 본가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을, 『화가들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까?』(이명옥 著)이다. 책의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여러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고 그 그림들에서 화가들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초등학생들이 읽기에 적합할 그런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이, 많이 어렸을 적인 내가 읽었을 때에도 좋았던,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책에 수록되어 있는 여러 그림들이 매우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이전의 내 글에서 수록하였던 여러 그림들을 그 책에서 처음으로 본 뒤 생각이 나서 사용한 것들이 있고, 그 책의 어떤 그림이 좋아서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본 뒤 적절한 그림을 수록하기도 하였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 중 하나는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단지 얼굴의 크기가 과장된 듯한, 인물의 얼굴살이 비대하여 눈, 코, 입이 얼굴 한가운데에 쏠려 있는 것이 그저 재밌다고 느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보테로에 대한 호감은, 전시회에 다녀오라는 방학숙제를 하기 위해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렸던 보테로의 전시회에 갔다 온 경험까지 이어졌더랬다.


 나의 지금까지의 미술에 대한 의견은 바로 저 어렸을 적의 내가 보테로를 좋아했던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저 창세기의 한 구절처럼, 신이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보면서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한 것과 매한가지로, 내가 '보기'에 좋은 그림, 조각이라면 좋은 미술이라고 생각해왔고, 오로지 이 잣대만을 준용하여 어떠한 미술 작품을 평가해왔다. 그리고 오히려, 커가면서 나만의 사상을 쌓아 올리고, 주관이 확실해져 갈수록 어떠한 미술 작품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나, 감상들을, 나만의 감상에 선입견 혹은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되도록 접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던 것 같다. 내가 미술에 관해서 믿는 것이라고는, 그러한 전문가들의 평론보다는 나의 '눈', 그리고 그 미술 작품을 창조해낸 그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좋은 작품'이라는 기준에 도무지 부합할 없는 작품들이 있었으니, 바로 흔히들 말하는 '현대미술'이었다.


 누런 배경에 밑으로 갈수록 붓터치가 점점 희미해지는 파란색 선을 그린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를 처음 접한 것은, 민음사에서 출판된 『노르웨이의 숲』의 표지에서였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책 제목과 그림을 보니, '선'들이 나무를 뜻하고, 선들의 집합이 '숲'을 의미하는 것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바로 잠시 뒤 이러한 나의 생각에서 출판 담당자가 <선으로부터>를 표지로서 사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림을 그린 작가가 그런 단순한 생각에서 저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내가 현대미술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불쾌감이 들었다.


 위의 그림을 비롯한, 소위 '현대미술'의 명화들이라고 하는 작품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 그림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작가가 어떠한 것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 그림이 왜 명작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 것인지 공감을 하지 못했다. 이와 더불어 나는 도저히 공감을 하지 못하겠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평론가들이 명작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겠지만, 그러한 이유를 '대중'으로서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과연 '명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명작인 이유가 '그들만의' 이유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현대미술의 작가와 평론가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왔다.


 나는 현대미술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나와 가장 가까운, 타국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지인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녀가 나에게 미술에 대해 조예가 깊은 입장에서 해주는 말, 저러한 작품들이 왜 '저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의하기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생각은 없어졌을지라도 저 작품에 대해서 이전과 비교하여 다른 긍정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그녀와 나는 미술, 특히 어떠한 그림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내가 물어보고 그녀가 알려주는 식의 대화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나에게 추천해준 책이 바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였다.


 아마 곰브리치의 이름이나 『서양미술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으리라. 너무나 유명하고, 말 그대로 서양의 미술 작품들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미술에 대하여 식견을 가지려 하는 이들에게 그 여행의 첫 단추로서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녀도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해줬을 것이다. 나도 이 책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고, 언젠가 읽어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터라,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에서 미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면 현대미술이 왜 저러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졌었다.


 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동양의 작품도 아주 극히 다루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서양의 조각, 회화, 건축물 등 미술이 걸어온 역사를, 그러한 작품들이 일궈낸 작가에 주목하는 전개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이렇게 어떠한 화풍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 없이 작가에 주목하여 논하는 것이 어쩌면 미술에 대해 엄밀한 학문의 성격으로서 접근하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의 지식욕을 충족시켜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어디까지나 '개론'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곰브리치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미술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이를 해결하고, 이러한 해결책이 하나의 화풍으로 발전하며, 다시 이 화풍이 당시의 대세로 자리매김하면 그러한 화풍에 대해 제기된 문제점을 다시 다른 예술가, 혹은 그 예술가 자신이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과정을 보고 '변증법', 즉 '정'과 '반'이 존재하고 이 대립 속에서 새로운 '합'이 탄생하는 식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으나 곰브리치는 이러한 일절의 발전은 미술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이에 대한 한 가지의 예를 들자면, 피렌체 미술가 들 중 브루넬레스키 이래로 미술가들은 원근법과 단축법을 이용하면 이전의 중세미술과 달리 현실 세계를 더욱 잘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원근법과 단축법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그들은 마음껏 현실세계와 닮아있는 그림들을 그려나간다. 같은 주제를 그렸으나 단지 시간대가 다른 아래의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피렌체 미술가들이 무엇을 발견했고, 어떤 것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스바비아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수태 고지>
프라 안젤리코, <수태 고지>


 하지만 이러한 원근법과 단축법을 사용하던 피렌체의 미술가들은 장애물에 부딪히게 된다. 이전의 중세미술의 경우 원근법과 단축법과 같은, 현실 세계의 모방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의도하는 바 혹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종교적 주제의 내용을 명확한 배치나 색감 등을 통해서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축법과 원근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인물이나 사물들의 배치에도 제약이 생기게 되었고, 또한 명암을 나타내기 위해 색의 밝기를 조절함에 따라 주변의 색이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는, 중세의 그것과 비교하여 색을 단조롭게 사용하게 됨으로써 그림 내 사물과 인물이 잘 부각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아래 그림과 같이 일부 미술가들은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인물들의 배치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오히려 그림이 현실에서 동떨어져 보이는, 어색해 보이는 효과를 낳는 등의 효과를 낳았다.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피렌체 예술가들이 맞닥뜨렸던 이 장애물에 대해서 보티첼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명확한 원근법이나 또렷한 윤곽 등과 같은 정확한 현실세계의 모사에서 의도적으로 멀어짐으로써 다시 작품 내 조화와 아름다움을 쟁취할 수 있었다. 아래의 그림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그림이지만, 비너스의 자세, 특히 목이 왜곡되어 이상하다고 느낀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인물들의 왜곡됨, 곡선이 오히려 이 작품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으며 이러한 보티첼리의 성공은 후대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게 된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곰브리치는 위와 같은 전개 방식을 사용하여 고대 이집트의 벽화, 부조에서 시작하여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의 미술의 역사를 설명한다. 만약 곰브리치가 그 과정에서 인상주의의 화풍은 어떠한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고, 고갱이나 고흐는 다시 인상주의의 어떠한 화풍에 대한 반발로서 나온 것이라고, 단순히 말 그대로 서양의 미술 역사에 대해 서술하기만 했다면 아마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곰브리치는 책의 처음과 끝에 밝히고 있듯이 미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대신, 책에서 계속 강조해왔던, 예술가들의 진부함, 장애물을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노력과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서의 작품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곰브리치의 생각, 그토록 현실세계를 아름답게 모사하는 작품들을 창조해낸 인간은 오히려 바로 그 너무나 아름답게 모사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대미술이 먼 옛날의 아프리카 부족의 가면에서 단순성, 명확성에서 교훈을 얻고, 또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생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대목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현대미술을 어느 정도 이해 내지는 용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다시 나의 지인이 현대미술의 의의에 대해서 나에게 설명한 것을 곰브리치의 서술 방식에 대입하여 예로 들자면, 현실 세계를 정확하게 모사할 수 있는 '사진 기술'이 발명된 이래로 현실 세계를 모사한다는 것은 큰 매력이 없게 되어 이는 미술에게 새로운 장애물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 과연 그렇다면 '미술'이라는 것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이고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노력이 바로 현대미술이라고 한다면 이 현대미술도 곰브리치가 말한 극복의 노력의 일환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미술이 단순히 현실세계를 모사하는 것을 넘어 관람자로 하여금 기호와 실제의 의미, 혹은 기호와 이미지 사이의 모순을 생각해보도록 하는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과 현대의 미술가가 작품을 창조한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 예술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뒤샹의 <샘>이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현대미술에 대한 용인에서 더 나아가 나는 어렸을 적의 내가 보테로의 그림이 단순히 '재밌어서' 좋아했다는, 좋은 미술 작품이라고 판단하는 바로 그 잣대가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어떤 미술 작품이든 간에 작품은 어쨌든 작품을 창조한 미술가가 느꼈을 진부함과 당시 미술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 작품을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폄하할 이유가 전연 없는 것이고, 모든 미술 작품은 동일하게 이러한 가치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선입견도 가질 필요 없이 단순히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미술 작품은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술 작품에 대한 순수한 감상을 했던 어렸을 적의 내가 보테로의 그림이 단순히 재밌다고 생각해서 좋아했던 것에 반해, 나는 커가면서 미술 작품을 비롯한 예술 작품은 결국 대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대중에서 멀어진 예술작품은 높게 평가할 수 없다는, 일종의 '선입견'에 갇혀 현대미술이 일궈낸 작품들에 대한 순수한 감상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곰브리치가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작품이 어떤 특별한 이유로, 혹은 의의를 갖고 있다는 배경지식에 힘입어 그 작품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나 어떤 작품이 어떤 화풍에 속한다고 하면서 그 작품을 평가하는 것도 선입견의 일종으로서 관람자로서 지양해야 할 태도로 지적하고 있듯이, 혹자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같은 미술과 관련된 서적 또한 어떠한 작품에 후광효과를 입히므로 선입견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던 이집트의 벽화가 미술과 관련된 책을 읽고 왜 그렇게 그려졌는지, 그려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나서 다시 보면 그 벽화를 다시 한번 면밀하게 관찰하게 되면서 그 벽화에서 느낄 수 있는 나만의 즐거움을 찾을 기회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마지막으로 나의 지인이 성토한 '차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영화가 재밌으면서도 어렵다고 느껴지면, 혹은 재미도 없으면서 어렵다고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일부는 그 영화에 나오는 어떤 미장센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영화에 쓰인 미장센들을 다룬 글과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기까지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느낀 바로는 나홍진 감독의 <곡성>,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그러한 미장센을 탐구하는 욕구를 자극하는 영화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현대미술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는 이들은 대개 '나도 저 정도는 그릴 수 있어.', '누런 종이에 선 하나 딸랑 그려놓은 것이 무슨 예술작품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현대미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나는 모르겠지만 뭐 무슨 의미가 있겠지.'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똑같은 예술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개 영화는 일정 정도의 노력을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공부'에 투자하는데 반해, 미술 작품에는 그러한 노력을 투자하지 않고 부정적인 생각이나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유독 미술에 대한 일종의 '차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곰브리치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 대중의 편견 없고도 이해심 깊은 관심 없이는 현대미술이 과거 찬란했던 인류의 미술에 새로운 보물을 더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지인이 말한 저 '차별' 또한 현대의 미술을 과거의 미술가들이, 작품들이 겪었던 '장애물'인 것은 아닐까? 이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미술이라는 예술 영역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을 갖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바다.


 끝으로, 앞서 설명한 모든 생각들은 차치하더라도, 
한동안 책에 수록된 그림, 조각 등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 이 책을 추천해준 지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루벤스,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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