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꽝쾅쿵 Jan 16. 2022

『불복종에 관하여』를 읽고...

불복종은 복종이다.

1. 들어가면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것? 똑똑해지는 것? 나는 아직 육아를 해보지 않아서 과연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장 많이 바라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른들이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안다. "○○아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나쁜 아저씨가 와서 잡아가."와 같은 상투적인 말들 말이다. 하긴, 처음에 말한, 아이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나, 똑똑해지는 것들은 어쩌면 그 아이가 부모님의 말을 잘 듣기만 한다면 자연스레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일 수도 있겠다. 단, 그 부모님이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똑똑하여 아이를 옳은 길로 인도해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위에서 말한, 아이들이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복종'이라고 볼 수 있다면, '복종'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불러오는 불쾌감이나 부정적인 뉘앙스와는 다르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복종에 대해서 꽤 친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우리가 성인이 될지라도 우리는 '복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경우 군대에 가서 조교나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고, 대학생의 경우 교수들의 말에 절대복종할 것이며, 취직을 하고 나면 부서장을 비롯한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책 『불복종에 관하여』의 제목이 불러오는 이상한 불쾌감이나, 중2병스럽다는 느낌, 그리고 공개된 장소에 이 책을 꺼내놓는다는 것이 왠지 꺼려지는 것조차, 우리가 복종에 너무나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의 대표작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과 같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내가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불복종에 관하여』에서 에리히 프롬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현대 사회에 만연한 복종의 행위와 그 위험성에 대해서, 그리고 불복종이라는 것이 왜 다시 '복종'이라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1부. 불복종과 자유', '2부. 휴머니즘의 정치경제학', '3부. 현대 사회와 인간 존재', '4부 그리스도의 교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1부의 내용에 대해서만 다루어 보려고 한다. 책은 비교저 최근에 나온 '마농지'에서 출판한 책이 아닌 지금은 절판된 '범우사상신서'의 책을 참고하였다.


2. 인류 역사의 시작으로서의 불복종

 에리히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류 역사는 불복종의 행위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제 복종의 행위로 인해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프롬은 히브리 신화, 그러니까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인류의 역사는 불복종의 행위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신은 인간이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나, 결국 인간은 그 명령을 어기고, 불복종하여 선악과를 먹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자연과 일체가 되어, 그 자신들이 나체로 있어도 전연 낯설게 여기지 않고 친숙하게 여기며 낙원에서 살아가던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들은 이제 이 세계와의 '탯줄'이 끊어지고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낯섦, 심지어 인간들 서로에 대한 적대심까지 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와의 절연,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고, 이제는 인간 그 자신이 스스로 예전에 살던 낙원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러한 최초의 불복종, 그리고 이로 인한 자유와 새로운 낙원에 대한 향수로부터 인류의 역사는 시작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는 어떠한가?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게 된다. 이렇게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불을 받은 인간은 이것을 발판 삼아 도구를 만들고, 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 신화에서도 인류의 역사가 불복종의 행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말고도, 프로메테우스 그 자신이 신에게서 불을 훔친 죄로 벌을 받았을 때 그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해, 카뮈를 비롯한 서양 문화권에서는 프로메테우스를 '반항', '불복종' 그 자체로 숭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복종의 행위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에리히 프롬은 자신이 살던 20세기의 가장 첨예하고도 위험한 대립이었다고 할 수 있는 냉전, 그리고 냉전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었던 핵전쟁에 대해 예를 들면서, 복종이 히브리 신화와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는 데에 단초가 되었다면 그와 반대로 인류의 종말은 핵전쟁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라는 지도자에 대한 '복종'에 의해서 비롯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핵미사일 단추'와 같은 매우 구체적인 예 말고도 프롬은, 인류가 이전 인류 역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과학적 발전을 이뤄냈을지 몰라도, 프롬 자신의 용어에 따라 인간(man)이 진정한 인간(human)으로는 거듭나지 못했다고, 즉 인간이 정서적으로는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이 정서적으로는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것은, 소련을 위시한 제2세계인 공산진영에서는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인 폭력, 억압에 대해서,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제1세계인 자유진영에서는 그보다는 교묘하고도, 간접적인 암시, 설득에 대해서 불복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3. 복종과 불복종

 그렇다면 프롬이 말하는 불복종은 과연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인가? 단순히 남들이 흔히들 말하는 어떠한 격언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한다면 그것을 프롬이 말하는 불복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복종할 줄만 알고 불복종하지 못한다면 그는 노예이다. 반면에 불복종할 줄만 알고 복종할 줄 모른다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라 반도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자는 확신과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분노와 실망과 원한에 의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반란적인 불복종은 반대로 "아니오"라고 말할 '능력이 없는' 순응자의 복종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이고 무기력하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선택한 양심의 원칙에 복종할 수 있기 때문에 불복종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이다. 즉 나는 반란에 대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쩌면 프롬의 저러한 불복종이 아닌 '반란', '반도'로서의 행위는 내가 이전 글에서 언급한 허무주의적 행위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복종은 넓은 의미에서 나의 상사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을 비롯해 나의 욕구에 대해서 그 욕구에 부합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도 포함될 수가 있다. 그러나 프롬은 용어 상으로는 상사의 말에 따르는 것과 나의 욕구에 따르는 것 모두 '복종'한다고 표현하지만, 상사를 비롯한 여럿 사회가 제정해놓은 제도, 위계 등에 자율성, 즉 나 자신의 의지나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 복종, 타율적인 순종이라고 하고, 나 자신의 이성, 이성을 사용하여 얻어낸 확신(에서 비롯된 욕구)에 대한 순종은 '복종'이 아닌 '긍정의 행위'라고 말한다.


 복종과 불복종은 그 근원에서도 구별할 수가 있다. 복종,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타율적인 순종은 프롬에 따르면 '권위주의적 양심'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 권위주의적 양심은 사회의 권위가 개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어떤 행위를 해도 되는지, 되지 않는지에 대해 명령을 하는 내면화된 잣대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프롬은 프로이트의 '초자아'가 이 권위주의적 양심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주의적 양심은 사회에 의하여 은연중에 형성된 양심이고 이를, 자신이 온전히 형성해낸 양심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내면화되었다는 측면에서, 표면에 드러나서 개인을 직접적으로 억압하는 권위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프롬은 말하고 있다. 또한 이와 반대되는 것은 '인간주의적 양심'으로, 인간주의적 양심은 인간이 인간의 삶을 더욱 충만하게 있는 것을 있다는 전제하에 이렇게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 않고 더욱 풍요롭게 하는 선택을 하는 양심을 '인간주의적 양심'이라고 프롬은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는데, 나는 프롬의 다른 책을 읽어오면서 프롬이 내가 아는 다른 철학자, 사상가, 작가들 둥에서도 단연코 가장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많다. 그의 글을 읽는 누구라도 그가 가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그의 책들에서 철학자로서의 기본적인 태도 또한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을 사랑하라'는 격언이었다. 이처럼 그의 책을 읽으면 타락한 나의 마음이, 허무주의로 기울고 있는 나의 마음을 어떤 따뜻함으로 치유해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시간이 갈수록 프롬의 이러한 '인간주의적 양심'과 같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진 어떠한 능력에 대한 믿음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더욱 많아지는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프롬의 감성적인 인간에 대한 사랑, 비논리적인 태도가 바로 프롬의 한계라고 생각이 된다.



 프롬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복종의 근원을 두 가지로 나누면서, '비합리적인 권위'에의 복종은 굴종, 복종이고, '합리적인 권위'에의 복종은 복종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합리적인 권위란 노예와 주인의 관계와 같이 한쪽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한쪽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관계를 말하며, 합리적인 권위란 한쪽에게 좋은 것이 다른 쪽에도 좋게 작용하는 바람직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 단어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비합리적인 권위는 그 권위를 복종하는 쪽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기에, 즉 그 자신의 이성이 명하는 것이 아니기에 앞서 강제, 억압, 교묘한 속임수를 통해 권위가 실현되며 합리적 권위의 경우 (복종이 아닌)긍정하는 쪽이 그 자신의 이성이 명하는 바에 따라 자발적으로 자신이 긍정하는 대상을 좇으려 노력한다.


4. 예언자와 제사장

 프롬은 오늘날만큼 과거 저명한 철학자와 선지자들, 그리고 도덕의 교사들의 사상이 널리 퍼진 적은 없다고 말한다. 실로 맞는 말이다. 약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의무교육과 같은 교육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만 하더라도 수많은 사상가들의 모범, 혹은 반면교사로서 삼을 수 있는 인물들을 볼 수 있으며, 지금 당장 유튜브에 '칸트'를 검색하면 칸트가 우리에게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칸트가 왜 서양 철학사에 대단한 위치를 갖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이나 지식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사상들에 대해 가슴 깊이 새기면서 살아가지는 않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프롬은 사상과 이념을 진정성을 갖고 그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사상과 이념을 몸소 실천하는 '교사'가 우리 시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프롬은 이렇게 사상과 이념들에 대해 진정을 사람들에게 전파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러한 사상과 이념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칭한다. 이 예언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어떠한 생각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느끼고 사상과 이념으로 발전시켰으며, 다른 사람들이 이 사상과 이념에 대해 알게 되면 더욱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지 이러한 확신에서, 자신이 반드시 그러한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예언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상과 이념을 전파했으며 그 과정에서 권력과 같은 부수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한 예언자들에 대한 태도에는 자신이 예언자로서 이 땅에 온 것이라느니, 그러한 영웅주의적이거나 낭만주의적 태도가 보이지 않았으며, 프롬은 예언자들이 스스로 예언자가 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책임이 있다고 느끼게 된 사람은 그가 양떼를 치고 있었건 포도밭을 가꾸고 있었건 또는 이념들을 발전시키고 가르치고 있었건 간에 예언자가 되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진실을 보여주고 선택의 대상들을 보여주며,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예언자가 할 일이다. 목청껏 외치면서, 타성적인 습관에 젖어 반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깨우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다. 예언자를 만드는 것은 예언자가 되려는 누군가의 소망이 아니라 역상적 상황이다.


 예언자들이 전파한 이념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제사장'이다. 이 제사장은 이념의 실천이나, 이 이념을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념을 정형화(formula)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정형화된 이념에 찬동하여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제사장들은 이념의 적절한 표현을 통제함으로써 인간을 조직화하고 통제하는데 이념을 사용한다. 이리하여 제사장들은 인간을 마비시킨 후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인식하거나 삶의 방향을 설정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인간들의 삶의 방향을 인도하는 것은 자신들의 의무이며 심지어 동정심에서 그와 같이 한다고 주장한다.


 프롬은 우리 시대의 예언자로서 버트란드 러셀을 예로 든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그 자신 또한 수학자, 철학자로서 '러셀의 역설' 등 학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이기도 한 그는, 사상가로서 진정 인간을 사랑했던, 그리고 인간이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해서도 외경심을 갖고 대했던 한 사람이었다고 프롬은 말하고 있다. 또한 프롬은 버트란드 러셀은 사상가이긴 했지만, 동시에 현실에 참여하는 사상가로, 진정한 의미에서 '예언자'라 불릴만한 인물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러셀이 가장 강조했던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 중 하나가 바로 '불복종'이다.

그러나 만약 사상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다수의 소유가 된다면 우리는 아마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중략)"노동자가 부에 대해서 자유롭게 생각하게 된다면 부자들은 어떻게 될까? 젊은 사람들이 성에 대해서 자유롭게 생각하게 된다면 성도덕은 어떻게 될까? 군인들이 전쟁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게 된다면 군사훈련을 어떻게 시킬까? 사상이여, 물러가라! 편견의 그늘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부와 도덕과 전쟁이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고 게으르며, 억압을 당하는 편이 그들 사상이 자유로와지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낫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이 자유로와지면 우리와 다르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러한 재앙은 막아야 한다." 사상의 반대자들은 그들 영혼의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에서, 학교에서, 대학에서 이렇게 행동한다.


5. 현대 사회와 불복종

 위에서 말한 프롬과 러셀의 불복종에 대한 옹호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러셀의 말과 마찬가지로 기득권을 가진 사회는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고 불복종은 악으로 여긴다. 이러한 불복종에 대해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내가 처음에 말한 '불복종'이라는 단어에 대한 불쾌감의 근원일 테다. 특히 영혼의 성장,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남긴 예수를 믿는 기독교에서조차도 진정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었고, 심지어 개신교의 경우 카톨릭의 그것과는 다르게 세속적인 권위에 영합하려는 움직임마저 내비쳤다고 프롬은 평가한다.


 특히 현대사회의 경우 이러한 불복종에 대해 악이라고 규정하는 행위는 기득권이 아닌, 똑같은 지위를 가진 일반국민 등의 비 기득권층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기득권층이 아닌 비 기득권층에 의해서도 불복종이 나쁜 것이라고 규정되는 것에는 현대 사회가 지닌 권위가 그 근원으로 지목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고도로 발전한 사회이다. 현대 사회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 체계들은 인간이 가진 '이성'에 의해서 설계된 것들이다. 특히 패스트푸드점에서 손님과 점원이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을 때, 카운터의 높이가 몇 cm일 때 가장 손님의 소비욕을 자극하는 등과 같은 예를 볼 때는 그 현대 사회의 치밀함, 명확함에는 경이롭다는 의미에서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러한 이성에 의한 치밀함과 명확함에 대해서 어느 누가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또한 현대 사회는 그 끝, 위계 구조 상의 꼭대기가 누군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관료주의 사회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불복종을 한다고 해서 그 거대한 관료주의 사회에서 무엇이 바뀔 수가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 거대한 관료주의 사회에서 나의 바로 위 상사에게 불복종을 한들, 그 상사 또한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할진대 그러한 작은 톱니바퀴를 향한 불복종이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프롬은 버트런드 러셀과 대비되는 종류의 사람으로서 '시체 애호증(네크로필리아)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삶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파괴하려는,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2차세계대전과 1차세계대전 전간기에 여러 제국주의 및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옹호하고 있는 파시즘과 나치즘이 결국 전쟁을 불러온 것과 같이 전쟁을 찬양하는,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프롬은 파시즘, 군국주의, 제국주의 등의 사상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양화, 가치로서 숫자를 매기는 물질화에 의해, 개인을 사회라는 큰 기계에서의 작은 톱니바퀴 중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관료주의에 의해 시체 애호증을 가진 사람들과, 삶을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폭력과 전쟁을 불러오려 하지도 않는, 그야말로 '권태로운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6. 불복종을 위한 성격구조

 그렇다면 불복종을 위한, 불복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성격구조가 있을 것인가? 프롬은 그 자신이 사회심리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불복종과 인간의 성격구조에 대한 문제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심리학자로서 프롬은 인간이 어떠한 관념이나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가지는 것은 쉽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이나 생각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하고,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개인의 성격 구조에 달려 있으므로, 관념이나 생각이 실제로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성격 구조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프롬은 이러한 연구의 일환으로서 1930년대에 나치즘이 떠오를 당시 과연 독일 민중이 실제로 나치즘과 투쟁해야 할 때에 어떠한 선택을 할지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한다. 그리고 앞서 밝힌 것과 같이 생각이나 이념을 받아들이고 행동에 옮기는 것은 성격구조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 독일 민중의 성격구조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 것이다. 성격구조의 유형 중 '권위주의적 성격'의 경우 권위에 대해 복종함으로써 그 권위의 일부가 되고, 그렇게 권위의 일부로써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역감(sense of strength)과 권위에의 동일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이러한 권위주의적 성격은 힘에의 의지와 복종에의 의지라는 측면에서 가학피학성 성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이들은 자신과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권위와 일체가 되기 때문에 권위를 위협하는 것에 대해 기꺼이 싸우고자 한다.


 프롬은 또한 어떤 사람이 혁명가로서 활동한다는 것이 꼭 그가 혁명적 성격구조를 갖고 있다고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반항자'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냉랭한 사람이라고 프롬은 말하고 있다. '반항자'는 자신이 설정한 행동의 근거가 되는, 그리고 자신의 삶에 목적을 부여해주는 어떤 것에 대한 열정이 가득할 뿐이며, 이러한 정열적인 복종을 통해 자신이 설정한 '절대자'와 일체가 되려고 노력한다. 다음은 프롬이 말한 반항자와 20세기에 대한 평가로, 그 예로서,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히틀러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러므로 20세기의 정치 생활은 자칭 혁명가로서 출발하면서도 단지 기회주의적인 반항자에 지나지 않게 된 사람들의 도덕적인 무덤으로 가득 찬 하나의 공동 묘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반항자나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가진 이들과 달리 불복종을 행할 수 있는 혁명적 성격구조란 도대체 무엇인가? '혁명적 성격구조'라는 단어를 들은 이라면 누구나 그럴 테지만, 말 그대로 18세기의 프랑스혁명,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레닌을 위시한 2월 혁명 등,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성격구조를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과연 프랑스혁명 이후 벌어진 로베스피에르의, 그리고 소련에서의 공포정치를 생각해본다면 그 두 혁명이 모두 어느 정도 인간성의 말살을 불러왔다는 측면에서 권위주의적 성격구조에 더 가깝기에, 단순히 '혁명적'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혁명적 성격구조를 규정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듯싶다.


 누군가가 혁명적 성격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은 첫 번째로, 그 사람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혹자는 대부분의 성인이 이렇게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말하겠지만, 프롬은 자유와 독립의 문제에 있어서 생물학적 성장은 필수적 일지 몰라도, 누군가가 생물학적 성장을 거쳐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꼭 그가 자유롭거나 독립했다고 볼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하며, 참된 자유와 독립이란 "개인이 오직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느끼며,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외부의 세계와 하나의 생산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다음은 프롬이 인용한 에크하르트 수사의 말이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만일 외부로부터 그것을 판정하고 외부로부터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의 외부에서 신을 생각하고 신을 인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과 우리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신을 인식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혁명적 성격구조를 갖고 있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그가 그가 속한 집단, 국가, 사회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가 속한 공동체는 하나의 우연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태어나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여러가지 우연이 겹쳐 벌어진 사건에 불과하다. 혁명적 성격구조의 사람들은 이러한 우연을 넘어서서 전인류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자신과 아무리 물리적 간격이 크다고 할지라도, 지구 반대편의 공동체에 대해 인간성을 회복하라는 촉구를,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시간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단지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에 대한 편협된 숭배에 사로잡히지 아니한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과 같은 활짝 열린 눈으로써, 그리고 우연적인 것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우연적이 아닌 것(이성) 속에서 또는 인류 속에서와 인류를 위하여 존재하는 규범 속에서 찾아내고 있는 사람처럼 활짝 열린 눈으로써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혁명적 성격구조를 지닌 사람의 마지막 특징은 그가 '비판적 기분'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은 모름지기 모든 것을 의심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격언에 따라 이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로써 대한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같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면밀하게 관찰하며, 단 한 가지의 사실도 '원래 그런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면서 지나치는 법이 없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어떠한 이념이나 생각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응당 이러한 태도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만약 그들의 그러한 회의적 태도가 정말로 맞다고 생각이 든다면 '아니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그들은 권력이나 권위에 대해서 복종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판적인 분 이외에 또한 혁명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권력에 대해서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권력이 사람을 살해하고, 강제하며, 타락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의 몽상가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권력에 대하여 특수한 관계를 가진다. 그에게 있어서 권력이란 결코 신성화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결코 진리나 도덕이나 선의 역할을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7. 불복종은 복종이다.

 한 달 전쯤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주최하였던 소설 『백치』의 강연에 다녀왔었다. 강연자였던 '로쟈' 이현우 교수는 본디 작가라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더랬다. 강연 자체가 전반적으로 좋긴 했지만,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 글도, '대선'이라는 거대한 이슈를 앞두고 있는 지금, 내 나름대로 어떠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전혀 대단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나의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바로 이, 프롬의 『불복종에 관하여』가 우리 사회에 어떠한 의의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말하고자 한다.


 프롬은 '국가의 주권', '민족의 영예', '군사적 승리'를 대중의 맹목적 열광의 대상의 예로 들고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 우리 사회의 경우 '제각각의 정의'를 일반 대중이 가장 맹목적 열광을 보내는 대상이라고 들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전 글에서 밝혔다시피 나는 이 사회에는 사회 구성원들을 하나로 결집시킬 '시대정신'이 부재하다고 느낀다. 이러한 시대정신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몇몇 집단들로 분화되어 각각 그 집단이 추구하는 이념에 치우쳐 상대 진영을 '악'이라고 규정하여 서로 반목하기에 여념이 없다. 만약 그러한 집단들로 분화된 것이, 자신이 어떠한 집단에 속한다는 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이 사회를 올바르게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생각이 전연 없다.


 하지만 프롬이 살던 시대와는 다르게 발달한 미디어의 영향, 예를 들어 SNS, 포털 뉴스, 유튜브가 무차별적으로 찍어내는 검증되지도 않은, 가히 음모론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여러 정보에 무비판적으로 찬동하면서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게 옳고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진정 프롬이 말한 핵전쟁에 의한 전 세계적 재앙에 비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칭 이러한 대중들을 이끈다고 하는 인플루언서, 유튜버, 커뮤니티의 '네임드 유저', 심지어 정치인들조차도 대중들을 선동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것과 같은 일신의 이익을 취하려 할 뿐이며, 심지어 진정으로 자신이 기치로 내세우고 있는 사상을 좇는 이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테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에 피해가 간다는 이유만으로 침묵을 지키기도 하고, 자신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취하는 거대 정당에 몸을 담는 일도 스스럼없이 행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자칭 '저명한' 인사들이 프롬이 말한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장차 있을 대선에서 어느 한 사람을 찍으라고, 어느 한 당을 지지하라고 종용하거나 설득하기 위해서 이러한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이가 진심으로 어떤 한 사람을 지지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비판할 생각도, 그럴 자격도 나에게는 없다. 다만 나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 사회에 필요한 가치나 제도가 무엇인지 고민해보기를, 그러한 가치와 공약으로서 제도를 머리에 구상하고 있는 후보가 진정 있는 것인지 물색해보기를 주문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우리의 눈을 속이는 여러 '제사장'들의 말을 타파하는 비판적 기분, 인간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추구, 자유와 독립에의 추구와 같은 혁명적 성격구조인 것이다. 이 중에서 단 한 가지, 제일 중요한 태도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호히 언론이나 커뮤니티 등 세상에 존재하는 말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꼽을 것이다.


 프롬이 글 내내 '불복종'을 종용한다고 하여, '불복종'이라는 것은 종종 '혁명' 등과 같이 우리 사회에서는 가히 주홍글씨라고 할만한 '공산주의'와 연결되기 때문에 책 제목만 보고, 혹은 불복종이라는 단어만 보고 거북함을 내비치는 이들이 있으리라. 하지만 프롬은 마지막 부분에 가서 불복종의 '변증법적' 성격에 대해서 말한다. 그 변증법적 성격이란 불복종이란 어떤 것에 대한 복종이고, 복종은 어떤 것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가령 어떤 사람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신념 때문에 왕의 말을 거역하는, 왕에 대한 불복종이자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복종을 행할 수도 있고, 아이히만의 경우 인류애와 삶에의 경외에 대한 불복종과 권위에 대한 무반성적 복종의 행위로서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복종의 변증법적 성격이 말해주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 얘기했던 것처럼 '불복종'과 '복종'이라는 단어의 거북함이나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즉 프롬의 표현과 같이 불복종이냐 복종이냐의 문제가 아닌, 그것이 복종이든 불복종이든 무엇에 대해 그리고 누구에게 복종하느냐 불복종하느냐에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기회로 하여 한 번쯤 자신이 무엇에 대해 불복종하거나 복종을 하고 있는 것인지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불복종이나 복종의 대상이 도대체 '무엇'인지 공표하는 행위로서, 반드시 투표권을 행사하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서양미술사』를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