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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Oct 25. 2019

『전락』, 카뮈의 현대인에 대한 고발

※책 제목: 『전락』(원제: 『La Chute』 )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옮긴이: 김화영

※출판사: 책세상


1. '전락(轉落)'

 전락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 일상생활에서는 아마 "XX로 전락해버렸다." 정도로 많이 쓰이는데 사전에서 그 뜻을 찾아보니


1. 아래로 굴러떨어짐 
2. 나쁜 상태나 타락한 상태에 빠짐


 으로 나온다. 이를 보고 생각해보니 일상생활에서도 "일순간에 사기꾼으로 전락해버렸다."라고 부정적인 의미로 쓰지, "그 일이 있은 뒤로 의인으로 전락해버렸다."와 같은 긍정적인 의미로는 쓰지 않는 것 같다.

추락, 혹은 전락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락'이라는 의미가 1.로 쓰인다면 카뮈의 『La Chute』는 추락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옮긴이인 김화영 교수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출판사에서는 『La Chute』를 『전락』으로 번역한다. 그렇다면 왜 'La Chute'는 나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전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전락』에 앞서...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전락』의 문학적 배경을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게 어떤 책이든 하나의 책은 장르적 구분이 따른다. 그런 측면에서 『전락』은 장르를 과연 소설로 봐야 할지, 에세이로 봐야 할지에 대해 고민이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 두 명으로 한 남자와 '클라망스'이다. 『전락』은 클라망스가 화자로, 클라망스가 남자에게 말을 하는 방식으로 작품이 진행된다.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이 소설 안에 직접 들어가 자신과 클라망스와 대화하는 남자를 '동일시'하여 클라망스의 이야기를 심취해서 읽는다면 이 책은 클라망스의 에세이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독자가 클라망스와 대화하는 한 남자와 자신을 '분리'한다면 이 책은 클라망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될 것이다.


 이렇게 장르적 구분이 모호하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여타 아주 많은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진 작품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이다. 『전락』과  『지하로부터의 수기』모두 한 명의 화자가 독자에게 독백을 하는 형식으로 작품이 진행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화자에 대한 치밀한 심리묘사가 가능해진다. 『전락』의 배경을,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통해 언급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겉으로 보기에도 그렇고, 또한 어느 정도는 도스토옙스키가 공산주의 및 무정부주의를 신봉하는 '지하생활자'를 비판하기 위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 지하생활자는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 체제를 전복시키는 상상 등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상상하는 바는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고 지하생활자는 평생 불평, 불만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책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더욱 자세히 뜯어보면 단순히 지하생활자를 '폐인'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없을만한 어떠한 철학적 내용을 지니고 있고, 실존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을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로 평가하고는 한다. 그렇다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러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가 뭘까?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앞서 밝힌 대로 화자가 자신의 생각을 직접 서술하고 있기에 작품에서 치밀한 심리묘사가 드러난다. 카뮈는 바로 이러한 서술 방식에 주목하여 자신도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같은 작품을 쓰겠다고 구상을 했던 것 같고, 그에 따라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전락』의 문체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화자 자체가 이전의 문학에 나타나는 인물들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화자가 그 이전의 문학과는 다르게 매우 입체적인,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는 매우 이해하기가 힘든 인물로서 묘사되기 때문이다. 현대적이라 일컬을 수 있는 도스토옙스키 작품들 이전의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작품 내에서 작가 자신의 생각 및 사상을 전달하기 위하여 어떠한   역할을 지니고 있으며 대개 이 역할을 벗어나는 모습을 지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화자는 어떨 때는 매우 안타깝기도 하고, 그 사람의 말이 맞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떨 때는 그 사람이 한심할 정도로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사람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도스토옙스키 이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비교하여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1800년대 내지는 1700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선과 악의 양분법에 의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과 같은 존재로, 이를 최초로 주목한 이가 도스토옙스키이며 그 결과물이 바로 『지하로부터의 수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을 '심연'으로서 바라보고, 선과 악의 양분법과 같은 잣대를 들이밀어서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존재'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실존주의 사상가, 특히 그중에서도 카뮈에게 이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으리라.


 카뮈는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을 너무나도 많이 받은 작가이다. 카뮈는 일기에 스티르너, 멜빌 등의  '외국의 모범들' 중에 도스토옙스키를 포함시키기도 했고, 그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와 『반항하는 인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 』, 자신이 무대에 올리기도 했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등장인물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하곤 한다. 결론적으로 카뮈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고, 이와 관련해서는 한편의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이니 여기서는 이만 줄이기로 한다.


3. 작가의 말

 카뮈의 문학작품들, 예를 들어 『이방인』, 『페스트』 등의 작품들과 더불어 이 작품 역시 매우 난해하고, 카뮈 특유의 메타포 및 섬세한 표현들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난해한 문장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작품에 앞서 수록된 '작가의 말'이다.


그는 현대적인 마음씨를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남들에게 심판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서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보다 더 자유롭게 심판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거울을 그는 마침내 다른 사람 앞에다가 쳐들어 보이고야 마는 것이다.


 아마 위의 문장으로서 『전락』을 모두 설명할 수도 있을 만큼 위의 문장들에는 『전락』의 주제의식이 적절히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카뮈는 남들에게 심판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둘러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을 '현대적인 마음씨'라 칭한다. 이것이 어째서 현대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카뮈의 활동 시기 직전, 그러니까 18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인간에게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법규, 종교, 더 함축적으로는 '신'이 존재했다. '신'은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그 고독한 존재를 충만하게 해줄 어떠한 초월적인 존재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신이 존재할 때만 하더라도 어떠한 사람이 과오를 저지르면 그 과오에 대해 당위성을 가지고 그 사람을 벌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이는 성경에서 "살인하지 말라<출애굽기 20장 13절>"는 율법을 어긴 것이고 바로 그 때문에 그 사람을 처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00년대 중반부터 '니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망치'를 들고 인간이 구축해 온 종교, 도덕 등의 신을 부수고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하니 과오를 저지른 이를 처단할 당위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십계명을 부수는 니체

 구체적으로, 앞서 예시로 든 살인에 대해 다시 설명을 해보자면,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당위성은 성경의 저 구절을 제외하고는 '노동력의 상실' 등을 들 수 있을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근거들이 성경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모래성처럼 무너질 가능성이 농후하고, 더욱이 그 근거라는 것이 인간의 이기심, 욕심 등에 뿌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니체는  인간이 1800년대 초반까지 이룩했던 도덕률, 원칙, 종교 등은 그 당위성이 없거나 혹은 인간이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의 어두운 면에 당위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찬란한 도덕률, 종교, 원칙 등은 니체가 죽은 1900년 이후로 그 빛을 바랬다.



 인간 세상에 도덕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 자신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에 따라 혼란, 고독이 인간에게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도덕률의 부재로 인한 허무주의를 서양철학에서는 '니힐리즘'이라고 부르는데, 니체는 이러한 니힐리즘이 인간에게 불러올 파국을 가장 걱정했던 철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니힐리즘이 절정에 다다라 벌어진 사건이 바로 양차 세계대전 및 그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학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는 기존의 전통적 윤리관을 가진 인간이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짓들을 저지른 인간, 자신이 저지른 죄를 참회하지 못하는 인간 등의 군상을 보면서 인간이 가진 도덕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인간에게 도덕률이 없고 개개인 모두가 자신만의 행위 준거를 가진 '심판관'이기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어떤 율법을 따르는 자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심판으로 인하여 자신이 믿는 질서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니까요. 그러나 인간이 맛보는 최대의 고통은 율법도 없는 가운데 심판받는 일입니다.


 또한 절대적인 도덕률이 있고, 그에 의해서 자신이 판단된다면 그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지만 절대적이지 않은 자신과 똑같은 타인이  자신을 심판대에 세운다면 이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부적절한 일이고, 어쩌면 사르트르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타인은 지옥이라고 한 것이리라.


 상기한 이유들로 카뮈는 심판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남을 심판하고 싶어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먼저 심판하는 것이 '현대적 마음씨'라고 칭한 것이다. 그리고 클라망스 또한 자신이 '전락'하기 이전에는 재판관들은 남들에게 벌을 주고 죄인들은 그 죗값을 치러야 하지만 변호사는 아무런 대가, 즉 책임을 지지 않고 죄인들을 변호하면서 자신이 그 죄인들에 비해 우월하다는 강점을 지닌 존재로서, 그리고 클라망스의 직업 그 자체로서 변호사를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한 여인의 추락, 그리고 클라망스에게는 '전락' 이후 클라망스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뭐니 뭐니 해도 남보다 높은 데서 산다는 것은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쳐다보이면서 존경받는 유일한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4. 한 여인의 추락, 클라망스의 전락

 클라망스는 그렇게 '변호사질'을 하며 남들에게 우월감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충만하게 하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클라망스는 다리를 건너던 중 자신의 뒤에서 '첨벙'하는 소리를 듣게 되고 이는 어떤 여인이 자살을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소리를 듣고 난 직후  클라망스는 속으로 '이미 너무 늦었어.'라고 되뇌인 뒤 가던 길을 계속 간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클라망스는 자신을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를 간헐적으로 듣게 되는데, 이 비웃음은 클라망스의 완전한 '전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클라망스에게 있어서는 모르는 한 여인의 추락 '따위'가 어떻게 그의 전 존재를 뒤흔들어놓은 전락으로 이어졌던 것일까?


 앞서 밝힌 것처럼 현대의 시대정신은 '그 어떤 도덕률도 믿지 말고 오로지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라.'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클라망스에게 있어서 그 여인의 자살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고, 더욱이 전통적 도덕률에 비춰보아도 클라망스에게는 방관죄 외에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클라망스에게는 신변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신변의 변화는 클라망스에게 있어서,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책임감 내지는 의무의 깨달음'이라고 칭할 수 있으리라.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에게는 그 누구도, 부모나 신조차도 제지할 수 없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져 있고, 그 자유를 만끽할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무거운 책임감이 뒤따라야 한다고. 바로 아래의 구절이 이를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반대로 자유는 고역이지요. 어지간히도 외롭고 어지간히도 지겨운 장거리 경주라구요.


고독한 인간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바, 믿는 바를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나 그에 상응하는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서 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 고독한 존재인 이유이다. 클라망스는 여인의 자살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남들의 우위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만끽하며 '변호사'로서 일체의 책무, 책임을 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여인의 자살을 보며 자신에게도 이 여인의 자살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클라망스는 '변호사'에서 '재판관 겸 참회자'가 된 것이다. 


 혹자는 클라망스가 자살을 방조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목격을 했을 뿐인 클라망스가, 더욱이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해야 하는 현대인인 클라망스가 어떠한 죄책감 내지는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에 의문을 갖는 이도 있으리라. 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현대인 클라망스는 죄책감, 책임감을 느끼고야 말았고, 이는 카뮈의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부조리'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토록 맹렬하게 무죄의 편을 들었고 어린애의 고통을 보고 몸을 떨었으며, 사슴이 사자 곁에서 잠자고 희생자가 살인자를 껴안는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사람이, 신의 논리적 일관성을 부정하고 자기 고유의 법칙을 찾아내려고 시도하는 순간부터 살인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카뮈, 『반항하는 인간』


 계속해서 말했던 것처럼 인간에게는 니체 이후로 더 이상 도덕률이 존재하지 않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배추를 손질하다 나온 달팽이 위에 소금을 뿌리고 그 달팽이를 칼로 자른다고 해도 이에 대해서 비판을 할만한 어떠한 도덕률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가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욱이 이러한 나이브(naive) 한 예시뿐만 아니라 히틀러, 아이히만이 저질렀던 극악무도한 범죄를 예로 든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행위, 전통적 도덕관에서 바라보는 악행은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고 이는 이 글에서 누누이 언급한 바에 의하면 '비논리적', 즉 '부조리'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조리함이 똑같이 클라망스에게도 적용된 것이며 클라망스는 이러한 부조리에서, 자신이 여인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자신이 져야 하는 책무를 느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클라망스, 더 나아가 현대인에게 있어서 'La Chute'가 단순한 상하운동의 '추락'이 아닌 부정적 의미의 '전락'으로 해석되어야 할 이유가 드러난다. 현대인이 전락의 순간을 느낀 이후부터는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책임감이 뒤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어느 하나 심각하지 않은 행위가 있을 수가 없으며 그러한 삶은 자신이 온전히 홀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고독이라는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전락의 순간은 성경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카프카의 문학에서는 '변신'으로, 사르트르의 문학에서는 '구토'로 나타난다.

전락의 순간

5. 재판관 겸 참회자

 클라망스는 전락 이후로 자신이 더 이상 변호사가 아닌 '재판관 겸 참회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 또한 죄인이라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취하는, 카뮈가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기방어적 태도로서, 자신이 먼저 타인들에게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야만 재판관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참회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클라망스가 자신이 더 이상 변호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직후 취하는 행동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클라망스는 전락 이후 다소 기행적인 행동들, 예를 들어 여자에 심취하여 집단 성교를 행한다든지 젖먹이 아기의 따귀를 후려치는 상상을 하는 등의 행동들을 보인다. 이는 자신이 더 이상 타인에 비하여 우위에 서있지 않고, 자신은 그들을 심판대에 올릴만한 어떠한 자격도 없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면을 스스로 벗어던지는 일종의 자기고백이자 앞서 설명한 니힐리즘의 행동 양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류 역사상 이러한 자기고백의 극한이 바로 그 유명한 사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드는 앞서 언급한 인류에게 주어진 달팽이를 자르거나 살인을 행하는 등의 '논리적 태도'를 극한까지 몰고 간 인물로, 그가 쓴 문학작품인 '소돔의 120일'에는 그가 이러한 논리적 태도를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위들, 예를 들어 고문의 기법이나 성적 쾌락을 위한 다양한 행위들이 묘사되어 있다. 사드의 이러한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은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에 나오는 "인간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오. 그녀가 어떤 사내와 쾌락을 나눈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되는 겁니까? 그것만으로 그녀에게는 충분한 보상이 되는 것이오."라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클라망스의 경우, 전락 직후를 제외하고는 사드와 같은 행동양식을 보이지는 않았고 그보다는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을 보인다. 즉,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의식하면서, 그 이름조차 매우 의미심장한 <결백한 재판관>이라는 그림을 훔쳐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그림을 절도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그중에는 독자, 즉 클라망스와 대화하는 남자도 포함되어 있다.)에게 알려 경찰이 죄인인 자신을 잡으러 와 자신이 마침내 구원을 받는 행동을 택한 것이다.


6. 카뮈의 고발

 앞서 클라망스의 전락 이후의 행동에 대해 사드의 그것에 비해서는 '소극적'이라고 칭했지만, 이조차도 어쩌면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적극적인' 행동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카뮈가 말하는 전락의 순간을 깨닫는 것이 매우 희박한 일이며, 그러한 전락의 순간을 목도하고도 클라망스가 그랬던 것처럼(클라망스의 경우 2년이었지만) 평생을 희미한 비웃음 소리만을 들으며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카뮈가 살던 시대인 1930~50년대에 비해서도 이러한 여인이 자살하는 것을, 전락의 순간을 깨달을 수 있는 다양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무서운 점은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을 부지불식간에 죄인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공범으로 만든다는 데에 있다. 자신은 그 행위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커피를 만드는 커피콩이 지구상 어딘가의 어린아이의 피땀이 서려있는 것이며 자신이 커피를 마심으로써 지불한 돈이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는 총탄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현대인이 전락의 순간을 목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자기 기만적인 행위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뮈가『전락』을 통해서 한, "모든 인간은 자신을 비롯한 전 인간 존재의 행위(악행)에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고발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망스조차도 그랬듯이, 카뮈의 고발이 행해지고 인간 개인이 그 고발을 진지하게 통감한다고 해도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드와 같은 적극적인 행위를 제외하고는 그 책임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극적인 행위밖에 없을 수도 있고 오히려 그러한 책무를 통감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고통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에 나타나는 것이 카뮈의 사상 전반에서 나타나는, 카뮈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반항'이라는 개념이다. 인간이 느끼는 책임감이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말했던 반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1800년대 초반 이전에는 인간이 신 혹은 신이 내려준 율법의 후광에 힘입어 아침의 찬란한 빛을 낼 수 있었다면 그 후에는 카뮈가 말하는 반항을 통해서 해 질 무렵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빛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영화에서는 하비 케이틀이 끝끝내 참회를 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장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결국에는 직면하는, 직면해야 하는 장면이라고 느꼈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비열한 거리(Mean Streets, 1973)>의 마지막 장면을 끝으로 글을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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