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를 추구할 수록 무력화되는 사고력
며칠 전 오후, 나는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한 메일 확인으로 시작된 일이 어느새 소셜미디어 피드, 뉴스 알림, 메신저 대화의 끝없는 순환으로 이어졌다.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스크롤을 반복했고, 뇌는 정보의 파편들을 무의식적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정작 처리해야 할 업무는 그대로인 채로.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사고가 멈춘 것이었다. 마치 자동차 기어가 중립에 걸린 채로 공회전만 반복하듯이.
이때 섬뜩한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가 '스마트'라는 이름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더욱 둔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공지능과 스마트 기기가 가져온 변화는 엄청나다. 복잡한 계산이 순식간에 처리되고, 방대한 정보가 손끝에서 검색되며, 창의적 아이디어조차 클릭 몇 번으로 생성된다. 우리는 분명 더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생각하는 고통을 회피하게 된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 끙끙대며 씨름하는 대신, AI에게 해답을 요청한다. 복잡한 논리를 차근차근 전개하는 대신, 검색 엔진에서 정리된 답을 찾는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사고력은 마치 운동하지 않는 근육처럼 서서히 위축된다.
불편함을 견디는 인내력, 모호함 속에서 길을 찾는 직관력, 실패를 통해 배우는 회복력 - 이 모든 인간적 능력들이 조금씩 퇴화하고 있다.
최근 "둠 프롬프팅(doom prompting)"이라는 흥미로운 현상이 화제가 되고 있다. AI 챗봇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마치 엄청난 생산성을 발휘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행동 패턴이다. '둠 스크롤링'이 진화한 형태이다.
이 현상이 교묘한 이유는 겉보기에 매우 건설적이고 지적인 활동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질문하고, 답변을 받고, 새로운 관점을 얻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마치 깊은 학습이나 창의적 사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우리가 얻는 대부분의 답변은 AI의 평균적 지식과 사고 패턴을 재조합한 것에 불과하다. 개별적이고 독특한 통찰보다는 안전하고 일반적인 견해들이 주를 이룬다. 사고의 과정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결국, 진짜 사고가 일어나는 순간 - 혼란스럽고 불분명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그 순간들 - 을 점점 더 회피하게 된다.
철학자이자 프로그래머인 폴 그레이엄은 예언적인 경고를 던졌다. "미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 쓸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여기서 글쓰기는 단순한 문자 조합이 아니다. 사고를 정리하고 표현하는 능력, 즉, 인간 고유의 지적 역량을 의미한다.
AI 시대에 이 경고는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만약 모든 사람이 동일한 AI 도구를 사용하고, 비슷한 프롬프트 패턴을 따르며, 유사한 사고의 템플릿을 답습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사고는 점차 평균을 수렴하게 될 것이다.
개성 있는 관점, 예상치 못한 연결, 기발한 상상력 - 이런 인간만의 특징들은 사라질 것이며, 대신 효율적이지만 예측 가능하고, 정확하지만 영혼 없는 결과물들이 양산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의 창의성과 혁신 능력이 위축될 위기를 내포하는 문제다. 모두가 스마트해질수록 그 누구도 사실 스마트할 수 없는 역설이 담긴 명제다.
이 역설적 명제를 직면한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기술을 거부하고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벌여야 할까? 한번 시작된 거대한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또 외면할 수도 없다. 그건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도적인 느림과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용기다.
때로는 AI 창을 닫고 백지 앞에서 혼자 고민해야 한다. 완벽한 답이 없어도 일단 내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 봐야 한다. 효율성보다는 깊이를, 속도보다는 사고의 방향을 기반으로 한 성찰을 선택하는 순간들이 필요하다.
진정한 창의성과 통찰은 언제나 건설적 마찰에서 태어난다.
건설적 마찰이란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히고, 실패를 견디고, 모호함 속에서도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AI가 제공하는 매끄러운 해답들은 이런 소중한 과정을 생략해버린다. 마치 에스컬레이터만 타다가 계단 오르기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AI의 도움만 받다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어갈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의 가장 값진 아이디어들은 대부분 느리고 비효율적인 과정에서 나왔다. 산책하며 떠오른 영감, 샤워하다 얻은 깨달음, 잠들기 직전의 번뜩이는 직관 - 이런 순간들은 AI가 흉내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소중한 시간들을 점점 더 스마트폰과 알림으로 채우고 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공백을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로 머리를 채우려 한다.
진짜 사고는 여백에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보이는 순간,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우리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자란다.
지금,
나는 정말로 스스로 사고하고 있는가
by 단호한 제제
- 기계가 대신 생각해주는 세상에서 여전히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느린 사고를 택하는
- 모두가 같은 답변을 양산하는 세상에서 나만의 고유한 시각을 키워가길 바라는
#디지털디톡스#창의성#인공지능#사고의무력화#둠프롬프팅#디지털중독#기술의역설#평균화#효율성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