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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꿀꿀 May 25. 2023

덩영할머니의 치마끈

얼마 전 유진숙여사에게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말여, 나물을 사러 중앙시장에 갔는데 아니 글쎄, 허리가 요-렇게 굽고 머리카락이 새-하얀 노인네가 오더니 나한테 다짜고짜 자네,자네 그러면서 반말을 하는겨!"

 여기까지 들었을때 나는 당연히 갈등이 벌어지는 줄 알고 눈치도 없이 맞장구를 쳤다.

 '아이고, 갑자기 왜 반말을? 그래서요 할머니?'

"근데 말여, 거기 장사하는 내 친구가 있어. 그 친구가 이 노인네한테 한 소리를 하는겨.  '아이구,  여기가 자네보다 형님이여! 반말하면 안댜.' 알고보니까 그 백발 노인네가 나보다 7살이나 어려! 잉! 80살 동생이라는겨! 그래서 내가 나는 87세유, 이렇게 말했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놀래가지고는 아이구 형님, 어쩌면 그렇게 피부도 건강하고 자세도 곧고 머리카락도 새까맣고 건강하냐면서 다들 아주 난리가 났어. 그래서 내가 한마디 더 했지. 나는 앓는 병도 없슈."

그 말을 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온통 함박웃음으로 가득하다.


 할머니가 굉장한 동안인것은 사실이지만, 낯선 이에게 반말을 들은 일에 이렇게까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나이든 자들의 특권인가보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표정을 짓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던 엄마와 이모와 나는 맞아 맞아 엄마가 동안이지, 맞아요 맞아요 할머니는 진짜 건강하세요, 하며 맞장구를 쳤다.

엄마가 한술 더떠 '그러게 엄마, 우리 몰래 피부과라도 다니는거 아녀유?' 라고 했더니만 할머니는 어디 그런 불순한 말을 하냐는 듯 예끼,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그런건 일체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할머니가 그런데 돈쓰실 할머니는 아니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할머니, 할머니처럼 건강하려면 이것만은 꼭 지켜야한다! 하는게 뭐가있을까요?저두 배워가려구요."

이모가 곧장 대답했다.

"우리 모아놓고 이렇게 얘기하시는거."

 엄마와 이모는 깔깔깔깔 웃음이 터졌지만 할머니는 이모의 말은 들은 체도 안하신다. 아아, 지원이가 아주 좋은 질문을 했다며 손바닥을 쓱쓱 비비시곤 장수비법을 설명하셨다.

"자, 일단 낮에는! 친구를 만나든 시장을 가든 어디든 밖에 나가 돌아댕겨야 하는겨.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두손을 모으고 부처님조상님 오늘도 건강하게 일보고 오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인사하는겨. 그리고 싹 몸을 씻고 거울도 보고 몸도 여기저기 두드려봐. 건강한가 보려고. 그리고 자기전엔 또 인사를 해야혀. 부처님조상님 오늘도 건강하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하고. 또 고기를 3일 먹었다, 그러면 3일은 나물에 된장찌개를 먹어야 혀. 알겄지? 꼭 기억해라."


할머니의 장수비법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는 얼마 전 할머니의 동화에서 본 덩영할머니의 치마끈이 떠올랐다.

<끈없는 할머니 이야기>

저 유진숙이 어려서 본 이야기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덩영엄마라고 늘 부르던 떠돌이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를 덩영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덩영할머니는 연세가 104살이라고 하셨고, 가족은 없었습니다.
덩영할머니가 우리 집에 가끔 들르면 우리 어머니는 반갑게 인사하시며 밥부터 드렸습니다.
덩영할머니는 숭늉을 드리면 호호 불어 드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뜨거운 숭늉을 마시고나면 집 생각이 난다며 눈물을 흘리시고는 하셨지요.

덩영할머니는 꼭 한복을 입고다니셨는데, 할머니는 치마끈이 다 잘려나가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렸을땐 전염병이 아주 심했습니다.
그래서 덩영할머니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기가 아프면 치마끈을 잘라 그 아이에게 달아주고 다녔지요.
"애기들아, 너희들도 나처럼 명이 길어 백살을 살어라" 하시면서요.

덩영할머니는 치마끈이 없으면 우리집으로 오셔서 어머니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그 할머니 손을 만져드리고,
무명으로 끈을 만들어 드리고 치마에도 달아드렸습니다.
덩영할머니는 그때마다 좋아하시며 세수도하시고 발도닦고 밥도 잘 먹고 가셨습니다.
나는 그 후로 앓을 때마다 덩영할머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그 할머니 모습이 가끔 떠오릅니다.

-유진숙이 본 이야기-

할머니가 묘사한 덩영할머니의 치마끈.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때 가장 처음 떠오른 의문은 왜 덩영할머니는 떠돌이할머니였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생각해보면 당시 104살이라면 자식도 손주들도 어쩌면 손주의 자식들까지도 생사가 묘연했을 듯 하다. 그러니 가족이 없이 떠돌이가 되는 처지가 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 그런 덩영할머니에게도 여전히 세상에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치마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짐작컨대 그런 덩영할머니가 가족도 없이 오래도록 살아 치마끈을 나누어주며 다닐 수 있던 것은 아마도 숭늉을 내어드리고 치마끈을 달아드리던 외증조할머니처럼 따뜻함을 내어주던 사람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장수비법은 그렇게 해서 이어진 덩영할머니의 치마끈 덕분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해서 104세 덩영할머니의 치마끈은 아주 오래도록 87세 할머니의 기억에 남아 28세 손녀의 글에서 이어지고 있다. 덩영할머니의 치마끈은 대체 얼마나 길고 긴 운명을 타고난 걸까? 이 글을 보는 독자님들의 마음에도 이 이야기가 남는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영원히 이어지는 치마끈인 것이다.

덩영할머니, 기 받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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