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Essay, writer. 신유진 씀
· 웹매거진 <쓰는 일>은 각자의 삶에서 다양한 씀을 경험하는 여성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첫 스페셜 에세이를 유진작가님께 요청드리고 원고와 함께 '글, 잘 부탁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애써서 문장 하나를 적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 질문을 던진 제게 답 같은 메시지였어요. 고이 진실을 전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당신이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길 원한다면, 먼저 바이올린을 손에 쥐어야 할 것이다. 화가가 되길 원한다면, 스케치북과 연필, 물감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이 작가가 되고 싶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완전하고 온전한 고독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책을 쓰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고, 마거릿 애트우드가 글쓰기를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말할 때, 그 어둠은 분명 1인용, 혼자 들어가야만 하는 곳일 테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고독을 위해서다.
어릴 때, 딱히 재능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던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책상 앞에 혼자 앉아 있기였다. 혼자 앉아서 상상하고, 이야기를 짓고, 일기를 쓰는 것. 그 혼자 놀기를 조금 근사한 이름으로 바꿔 부르면 고독이 아닐는지. 지금 내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는 것도 모두 그 ‘혼자 놀기’에 들인 시간과 정성 덕분이다. 그런데 그 달콤했던 시간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어느새 고독은 내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문제가 되어버렸다. 내 방, 작업실, 카페, 태블릿, 혼자가 되기 위해 알맞은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독을 조금씩 상실하고 있다.
방 안에서 스마트폰을 붙들고 인터넷 기사, 쇼츠 영상과 SNS를 기웃거린다. 나는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고, 수많은 인생과 남의 살림살이와 불필요한 정보들을 탐색하며 ‘이곳에 속해 있음’을 확인한다. 이 방 안에서 내가 마주하는 것은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외로움은 타인의 방문 바깥을 서성이는 것이고, 고독은 나만의 방,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이 타인의 방문 밖이 되는 순간, 나는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의 손을 잡게 되고, 외로움은 나를 이끌고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클릭, 스킵, 클릭, 스킵, 좋아요, 하트. 그러니 쓰는 사람의 첫 번째 과제는 이 외로움의 손을 과감히 놓는 것이다. 타인의 방문 앞을 기웃거리는 짓을 멈춰야 한다. 자기만의 방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필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용기일지도 모른다. 이곳에 잠시 속해 있지 않아도 괜찮을 용기. 세상의 바쁜 걸음을 좇아가며 헐떡이기를 멈추고 나의 자리로, 나만의 방으로 돌아가는 힘.
세상과 나를 잇는 그 선을 과감히 끊고 내 자리로 돌아온다. 오롯이 혼자가 되어 H를 만날 시간이다. H는 내게 큰 영감을 준 작가, 엘렌 식수이자 그가 말하는 글쓰기이다. 그는 H란 I와 또 다른 I, 그 사이를 진동시키는 선으로 이뤄져 있고, 여기서 I는 언어이며, 즉 글쓰기는 다른 두 언어를 연결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H를 내적 언어와 외적 언어, 개인적 언어와 공적 언어의 공명이라고 해석한다. 나 역시 오직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욕망의 시기를 지나면서 ‘나’를 쓰는 이유와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글 속의 ‘나’를 비개인적 자아로 만드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이야기일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서술자인 듯하다. ‘나’를 원료로 이용해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존재 말이다. 이제 나는 하얀 화면을 마주하고 나의 서술자를 기다린다. 우리는 만남을 약속한 적 없고, 그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절대 수동적 기다림을 뜻하진 않는다. 쓰는 일은 언제나 능동적이어야 하니까. 나는 서술자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창조한다. 아니, 창조적 기다림이라고 해야 할까.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H를 양식화한다. 사다리 모양이 보이는가? 물론 H를 사다리라고 말하는 것은 엘렌 식수의 주장이지만, 식수의 말에 완전히 매료된 나는 H를 기꺼이 사다리로 받아들인다. 자, 사다리를 타자. 내려가기 위해서다. 가장 낮은 곳,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감각과 표상, 지각과 의식, 기억을 통과하며, 더 아래, 더 깊은 곳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는다. 내가 찾으려는 무언가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진실’이 아닐는지. 서술자는 언제나 진실 옆에 있다. 사실 나는 진실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나의 진실이 타인의 진실이 될 수 있는지, 그때의 진실이 지금의 진실이 맞는지. 아니, 진실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지. 하지만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그것을 향해 가 보는 것, 그렇게 가다 보면 있다고 믿게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이다.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진실을 찾는 방식도 진실의 일부라고.
물론 의혹은 반드시 찾아온다. 일, 관계, 사람, 삶, 쓰고자 하는 이 열망까지도 모두 의심스럽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이 기억이 왜곡된 것은 아닐까? 이 이야기가 과연 글로 쓰일 가치가 있는가? 혼란이 시작된다.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은 덤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이 의혹과 불안이 글쓰기의 일부라는 것도. 그저 H를 타고 더 깊이 내려가야 한다. 서술자를 부르는 깊은 욕망을 깨워야 한다. 내 안에는 결국 쓰게 하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이 나의 기억과 지식, 해석과 시선을 바탕으로 서술자를 창조할 것이다. 그 서술자는 쓰지 않아도 좋을 이유를 밀어내며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은 서술자의 말들이 놓일 자리를 마련하는 게 아닐까. 그것을 문장이라 불러도 좋고, 글이라 불러도 좋다. 그의 말들은 진실의 일부이자 조각이고, 나는 그 조각들을 담아 누군가에게 건네길 희망한다. 내가 힘겹게 꺼낸 그 조각이 누군가의 조각과 만나기를. 내 조각의 움푹 파인 부분이 누군가의 볼록한 부분을 맞이하고, 누군가의 허물어진 귀퉁이를 나의 돌출물이 채울 수 있기를. 우리가 작은 진실을 밝히는 공모자가 되기를. 물론 이 모든 게 지나치게 아름다운 상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내게 글쓰기는 언제나 낙관적 행위였으니까. 절망을 품을 때도, 절망을 이야기할 때도, 쓴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낙관적이다.
나는 글을 통해 말한다. 내가 하는 말은 내 것에서 시작하나 결코 내 것이 아니고, 진실의 한 조각이지만 그것의 완전한 형상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의 불행과 절망을 위한 위로나 해결책은 아니어도 작은 낙관은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끝난다면, 그래서 우리의 무엇도 의미가 없다면 애초에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써 본 사람은 안다. 쓰는 순간 사라지는 무언가를 붙들 수 있다는 것을, 존재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를 품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이 삶의 증인이고, 삶은 증언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엘렌 식수 / 밤의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