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2일 월요일
날씨 : 런던 날씨(...알쥬?)
기록자 : 뽈
1.
2020년 6월 26일 금요일은 내가 남는 쪽인지 떠나야 하는 쪽인지를 통보받은 날.
울릉도 저동항 근처의 민박집에서 메일을 읽었다. 3박 4일간의 백패킹을 막 끝내고 일행들과 둥그렇게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며 아쉬움을 달래던 마지막 밤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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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살았다.
안도는 짧았다. 섬광처럼. 곧 몇몇의 얼굴이 번뜩였다. 어떻게 됐을까. 얼굴들이 씻겨간 자리로 밀려드는 헛헛함이 뜻 모를 것이었지만 또 아주 뜻 모를 것이 아님을 알아서 속이 울렁거렸다. 허허롭게 웃으며 소주를 마저 마셨다.
2.
런던으로 돌아온 뒤 처음 바깥에서 만난 사람은 동료 Y. 날씨가 어마무시하게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그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회사 근처 역에서 만났다. 다섯 달 만의 만남이 선사한 반가움도 잠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Y가 말했다.
있지, 모든 게 정상이 아니야.
호텔 소유의 다섯 개 아울렛 중 세 곳이 8월 중반부터 영업을 재개했다. Y와 내가 함께 일한 일식당도 그중 하나. 입사 3년 차인 그는 호텔이 문을 다시 열자마자 가장 먼저 투입된 인력 중 한 명이었다. 본래 백여 명이 훨씬 넘었던 F&B 부서 인원은 Y가 돌아갔을 때 스무 명 남짓이 되어있었다. 어느 팀이나 사람이 절반 이하로 줄었을 뿐 아니라 룸서비스팀, 직원 식당팀, 조식 준비팀처럼 아예 통째로 소멸해버린 팀도 많았다. 수 년 혹은 수십 년을 이곳에서 일한 사람들 다수가 인사할 기회도 없이 떠난 자리에 비교적 젊고 연차가 짧으며 여러 일을 맡을 수 있을 법한 이들이 채워졌다. 회사는 우리를 ‘Key Worker’, 또 ‘Skeleton Crew’라 불렀다.
바쁘지 않더라도 일의 절대량은 비슷하게 마련이라 백 명이 하던 일을 스무 명이 나눠서 담당해야 했다. Y는 일식당 홀에서 손님을 받고 배달 업무를 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바쁜 펍을 짬짬이 도와 키친에서 음식을 나르다가 룸서비스 콜이 뜨면 달려가 룸서비스를 맡았다. 새벽 여섯 시에 출근해 숙박객들의 조식을 준비하는 것도 Y에게 할당된 새로운 업무였다.
그러다 보니 근무 시간 연장이 불가피해 하루에 열 시간씩 일하는데, 문제는 휴식 시간이 일절 없었다. 밥은 고사하고 화장실 갈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직원 전용 화장실에 가려면 지하 2층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바이러스의 위험성 때문에 엘리베이터 이용이 금지된 데다 모든 곳에 최소 인원만 배치한 탓에 그 짧은 새일지언정 교대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코로나 여파로 매출은 여직 형편없었는데, 홍보는 마케팅팀의 역할이지 웨이트리스의 역할이 아님에도 꾸준히 매출 지적을 받았다.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셰프도 Y도 열 시간 내내 화장실 한 번 가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식당을 지켰다.
“소진된 에너지를 매일 억지로 쥐어 짜내는 느낌이야. 얘길 해도 돌아오는 건 모두가 똑같이 어려운 환경이란 말과 비아냥 뿐야. 우린 노예가 아니야. 돌아오길 얼마나 기다렸는데… 정말 유감이지만 퇴사할까 싶어.”
그의 말에 내가 더 놀랐다. 퇴사라니. 내가 아는 Y는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데. 일손이 빠르고 호흡이 잘 맞는 Y가 없다면 나 역시 일터에 가는 즐거움이 한층 낮아질 것이었다. 그날의 이야기는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달로 바뀔 때까지 이어졌다. 본 적 없던 Y의 피로한 얼굴과 진지한 어투가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걸렸다.
3.
얼마 안 가 Y는 정말로 사직서를 냈고, 나는 그의 마지막 출근날까지 단 하루도 함께 일하지 못했다.
내게도 새로운 롤이 할당됐기 때문이다.
“저기, 다음 주 스케쥴에 제 이름이 보이지 않아요.”
“아. 수요일부터 메인 바에서 트레이닝 받고 바로 투입될 거예요.”
“트레이닝요?”
“네, 바텐더 트레이닝요.”
4.
2020년 9월 9일은 재출근을 한 날.
출근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했음에도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 직원 전용 출입문으로 통하는 통로가 막혀있었다. 겨우 통로를 통과해 출입문 앞에 섰는데 이번에는 ID카드가 인식되지 않았다. 여러 번 초인종을 눌러도 답이 없어서 보안실로 전화를 막 걸려던 참에 누군가 문을 열었다. 지문 인식으로 출근 시각을 자동 등록하던 시스템이 수기 방식으로 바뀌어서, 명부에 보안 직원이 확인한 체온과 이름, 부서와 출근 시각을 나란히 적었다.
누구든 서로 불필요하게 마주치는 일을 피하게 하기 위해 복도는 일방통행이 되었으며 락커에는 동시에 여섯 명 이상이 입장할 수 없다. 물론 사람이 없어서 여섯 명 이상이 입장할 일 자체가 없었지만. 락커를 열었더니 일식당의 유니폼인, 알록달록한 새들이 그려진 푸른빛의 실크 블라우스 두어 장이 그대로 걸려있었다. 더 이상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준비해 온 흰색 셔츠와 검은 슬랙스를 입었다.
어디든 록다운 직전 마지막으로 출근했던 나날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고요하고 어두웠다. 온갖 섹션의 셰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탁탁탁 썰고 굽는 소리와 요리 냄새 사이로 바쁘게 오가는 발소리와 목소리, 웃음소리, 막 닦여져 나와 아직 뜨거운 김이 남아있는 컵과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 늘 재료가 적재돼있던 통로… 모두 온데간데없었다. 이제 그런 풍경은 한동안 없을 것이다.
5.
메인 바 홀에 들어섰다. 밤낮 할 것 없이 붐벼대던 홀이 역시 고요했다. 모든 고객은 입구에서 직원에 의해 체온을 확인받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 소독제를 쓴 뒤 입장할 수 있다. 바에 와서 주문하는 것이 불가하고 오직 테이블 서비스만 가능하며 메뉴판은 테이블 위에 놓인 QR 코드를 직접 스캔해 보는 것으로 대신되었다.
이전에 오며 가며 몇 번 마주한 적이 있는 바텐더 A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_ (Ⅱ)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