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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입니다 Apr 03. 2020

오, 격랑의 삶이여 - I

격랑의 발단 3.10 ~ 3.15

2020년 4월 3일 금요일

맑았다가 흐렸다가.

기록자 : 뽈     


*교환일기를 제대로 시작하기에 앞서, 들불처럼 번져오던 바이러스를 팔짱만 낀 채로 구경하던 유럽 상황이 내가 동굴에 갇히기 직전의 열흘간 어찌나 급박히 바뀌었는가를 복기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3월 10일 : 흉조의 서막

영국 확진자 373, 사망자 6

대한민국 확진자 7,513, 사망자 54     


쾌청한 하늘을 보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5월 휴가를 보낼 더블린 여행 정보를 찾아본답시고 시작한 게 아일랜드 문학이란 삼천포로 빠져 거의 밤을 새웠음에도, 몸만은 가뿐했다. 오늘은 하프 쉬프트라 괜찮아. 여느 때처럼 만원을 이룬 출근길 전철은 고요하고 평안했다. 리버풀 스트리트역에 다다르자 바로 앞에 선 학생이 읽던 책을 덮었다. 그런데 맙소사. 책 제목이 <고도를 기다리며>라니. 내가 새벽까지 파고든 새뮤얼 베케트잖아. 이런 작고 괴상한 우연이 있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혼자 의미를 붙이고 싱긋 웃었다. 날씨도 좋고 뭔가 특별한 아침이라고 생각하면서.      


   

이탈리아의 확진자 수가 곧 1만 명을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사망자는 463명입니다.
정부는 오늘 전국 모든 지역에 봉쇄령을 내리고 이동 제한을 선언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도 높은 조치입니다.     

오전 11시. 매일 이 시각이 되면 칸틴(직원식당)에 호텔 직원 대부분이 모여 20여 분간 점심을 먹는다. 밀라노 두오모 앞에서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탈리아 소식을 브리핑하는 BBC 특파원을 바라보며 나는 구운 콜리플라워를 질겅질겅 씹었다. 또 덜 익었어. 스크린 하단에 영국의 집계 현황이 한 줄로 떴다. 옆에서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출신 G가 재잘거렸다. 보이니? 우린 행운아야, 여긴 안전하잖아!

마드리드가 고향인 S는 콧방귀를 뀌었다. 행운은 무슨, 그냥 독감일 뿐이잖아. 왜들 저렇게 호들갑인지. 

     

런던에 오고 한 달 뒤 나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5성급 호텔 소속 일식 레스토랑의 정규직 웨이트리스로 입사했다. 매니저가 한국에서의 소박한 경력을 높이 산 덕에 11월부턴 일주일 중 이틀, 많게는 절반 정도 로비 바를 오가며 일해왔다. 메인 바텐더 F가 쉬는 날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 바텐딩을 맡게 된 것이다. 매니저는 연초부터 봄맞이 칵테일을 준비해달라 부탁했고,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레시피가 얼추 완성됐다. 녹차 티백과 생강, 레몬 껍질을 우려둔 보드카를 체크했다. 모레 저녁쯤이면 디렉터를 데려다 시음하게 하고 컨펌받을 수 있겠지. 결과가 좋다면 다섯 가지 칵테일이 정식 메뉴에 오를 것이다. 레시피를 마지막으로 손보는 내내 로비 프런트는 비어있었다. 점심 피크가 지난 뒤 매니저가 바를 살피러 왔다. 뭐 좀 팔았어요? 아뇨, 레스토랑은요? 그가 손을 내저으며 운을 뗀다. 이상하네, 지난주만 해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주초라 그렇죠, 뭐.  

    

퇴근 후 토트넘코트로드에 갔다. 반년 동안 신어 해지고 구멍 난 반스를 대신할 운동화 한 켤레를 고르고 걸칠 만한 재킷도 싼값에 건졌다. 다음 주에 파리 갈 때 좀 덜 부끄럽겠어. 집으로 향하는 길, 요즘 맘에 두고 있는 바 'M'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렀다. '한 잔만'은 당연히 '한 잔 더'가 됐다. 몇 번 오는 새 면을 튼 바텐더 R이 내일 뭘 할 거냐 묻기에 바다를 보러 간다고 말했다. 강제 휴일이니까 바다라도 가야지 싶어서요. 바다라면 브라이튼이죠, 신나서 이야길 하던 그가 계단을 내려오는 이를 보고 반색한다.


여어- 웬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왔어? 단골만 모였네. 여기 앉아요.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완연한 여자가 R이 가리킨 내 옆자리에서 한 칸 떨어진 곳에 앉았다.

진토닉 주세요. 아, 고객이랑 대면해야 하는 일을 일일이 서면으로 하려니 성가셔 죽겠어.

뭐야, 일하는 방식이 갑자기 바뀐 거예요?

뭐긴, 그 차이나 바이러스 때문이잖아요.      


눈치채버렸다. 그녀가 그 말을 하며 이쪽을 흘깃 본 것을. 그 순간부터 얼굴이 홧홧해졌다. R이 눈치챌까 싶어 조심스럽게, 그러나 황급히 짐을 챙겨 일어섰다. 곧 다시 올게요. 집에 돌아와 내일 입을 옷을 가지런히 개어 두다 그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곁눈질을 떠올렸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취기 탓이야. 기분 탓이야.  


    

3월 11일 :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립과 팬데믹 선언

영국 확진자 383(+10), 사망자 6(-)

대한민국 확진자 7,755(+242), 사망자 60(+6)     


“파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긴 한데.”

다음 주 파리에서 만나게 될 J와 며칠 전 소설 <페스트>에 대해 나눴던 말을 곱씹었다. 정말 큰 일이 없는 한 파리만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나 그의 말이 걸리긴 했다. 나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런던브릿지 기차역은 꽤 붐볐으나 평일 오전이라선지 기차 안은 한산했다. 평화로웠다. 4인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가져온 책을 읽다 까무룩 졸았더니 종착지 헤이스팅스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조용한 소도시였다. 이른 오후까진 하늘이 맑아 언덕 위에 오르고 바다를 볼 수 있었지만 곧 부슬비가 내리며 칼바람이 불었다. 소나기로 그칠 것 같진 않아서 가까이 있던 카페로 향했다.


반년만의 첫 나들이가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온통 영국인 혹은 영국인이 아닌 백인이 둘러앉아 있던 그 아늑한 카페의 문을 유색인, 그것도 아시아인인 내가 열었을 때 나는 그들 눈에 비치는, 티 내진 않으나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는 불길함과 모종의 경멸을 이제 확실히 읽었으며 이것은 더 이상 기분 탓이 아님을 깨달았고 동시에 약간의 모멸감도 느꼈지만, 나가야 할 이유가 하등 없고 감염자도 아니거니와 카페가 맘에 들었으므로 꿋꿋이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내가 그렇게 커피를 두 잔 마시며 <페스트>를 읽는 몇 시간 새 WHO는 팬데믹을 선언했고 메일함엔 ‘IMPORTANT’로 시작하는 제목의 메일이 와 있었다. 대문자와 ‘중요한’이란 뜻이 결합한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을 것이 확실한 제목을 클릭하자 파리발 런던행 유로스타가 전격 취소됐다는 내용이 떴다. 메일은 네 티켓은 가장 낮은 등급의 좌석이라 원칙적으로 환불 불가지만, 시국이 시국이고 운행 취소를 결정한 건 우리니까 일정을 무료로 변경하거나 전액 환불받을 기회를 줄게, 란 말을 하고 있었다. 어쩜... 젠틀하기도 하지. 젠장.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갈 텐데


런던으로 돌아가는 밤 기차 안에선 팀 리더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변경된 이번 주 스케쥴과 다음 주 스케쥴을 함께 보냈다. ‘내일 PD&E 차출은 이벤트가 취소되면서 없던 일이 됐으니 저녁에 출근하고, 회의가 끝나면 얘기하겠지만 모두가 휴가를 더 쓰게 될 것 같아.’ 나는 다음 주 스케쥴을 클릭해 확대했다. 내 근무 일수는 이틀이었다. 팀 리더가 문장 끝에 덧붙인 이모지가 땀을 비처럼 흘리고 있었다.      



3월 12일 : 많은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 것입니다

UK 확진자 456(+73), 사망자 8(+2)

대한민국 확진자 7,869(+114), 사망자 66(+6)     


3월 12일 기자회견 당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WHO의 팬데믹 선언 이튿날.

초엘리트 각료들과의 긴급대책 회의 후, 기자회견장에서 보리스 존슨 총리가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Many more families are going to lose loved ones.    

과학자문위원장 패트릭 발란스 경은 한술 더 떴다.


이미 국내 감염자가 최소 수천 명일 것으로 보인다. 완벽한 추적과 제거란 이제 와 불가능하다.
지금 영국으로서는 인구의 60%의 감염 시나리오를 받아들이고,
집단면역체계(Herd Immunity) 구축을 바랄 수밖에 없다.


영상 속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곳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술렁거리고 있었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그 브리핑 영상을 봤다. 오늘은 리유저블 컵을 꼭 사야지 했던 게 카페를 나오고 나서야 기억났다. 우체국을 경유해 출근해야 해서 돌아가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곧 또 올 건데 그때 사지 뭐, 라고 생각했었지. 한국에 보낼 편지를 부치고 호텔을 향해 걸으며 생각했다. 나라의 대표가 공식 자리에서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의 말대로라면 수십 만이 목숨을 잃을 거란 얘기인데 정말 그렇게 된다는 걸까. 그런데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게 전부인 걸까, 사람이, 죽는 일인데. 


긴급대책회의를 한 건 정부만이 아니어서, 내가 문을 막 열었을 때 가여운 우리 팀 매니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회의 결과가 빼곡한 노트를 보고 있었다. 호텔은 매일 수시로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끝날 때마다 새로운 불행을 안고 돌아온 매니저는 이번엔 로비 바의 영업 중단 소식을 가져왔다. 아침에 결정된 사안이라고 했다. 그럼 F는요? 모르겠어요, 일단 이번 주는 휴가 처리하고 다음 주에 다시 조정해 봐야죠. 서류 뭉치를 든 매니저가 떠나고 나는 말머리를 키친으로 돌렸다. 오늘도 꽝? 셰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일식당 문이 열린 이래 초유의 사태야. 과연 초유의 사태였다. 우리는 고작 여섯 테이블을 받았다. 평소 같으면 불이 나도록 연달아 울릴 배달이며 포장 주문도 침묵을 지켰다. 다들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묵을 지키는 일 뿐이었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바 창고에 들러 보드카를 탈탈 털어 버렸다.     



3월 13일 : 본격적인 사재기 시작

UK 확진자 590(+134), 사망자 10(+2)

대한민국 확진자 7,979(+110), 사망자 67(+1)     


어쩌다 밤을 새웠는데도 잠이 오질 않고, 변경된 스케쥴에 따라서 오늘 역시 쉬는 날이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1월 초에 사둔 생필품들이 이것저것 똑 떨어지는 시점. 페브리즈와 청소용 물티슈도 더 필요하고 요리용 오일이며 건허브류, 파스타도 얼마 안 남았다. 털레털레 걸어서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 ‘’Morrisons’ 앞에 이르렀는데 평일 아침인데도 주차장이 만차였다.

 

'박테리아 박멸'을 강조하는 각종 페이퍼들이 사라지는 중


설마 했지만 설마에게 잡혔다.  늘 그득그득 쌓여있던 멀티퍼포즈 클리닝 페이퍼가 없었다. 뉴스에서나 보던 사재기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휴지도 데톨 손 소독제도 핸드워시도 모두 동났다. 캔 통조림과 냉동식품 매대도 눈에 띄게 비었다. 나도 분명 사야 할 게 있었는데 텅 빈 클리닝 페이퍼 매대의 모습이 실감 나질 않아 잠시 멍해졌다. 외려 필요한 게 없어진 느낌이 들어서 카트를 꽉 눌러 담은 채 늘어선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왔다. 그 많은 사람 중 마스크를 쓴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유로스타 최종 취소 메일이 나를 반겼다.



3월 14일 : 강제 휴가 릴레이 속에 소멸된 진짜 휴가     

UK 확진자 798(+208), 사망자 11(+1)

대한민국 확진자 8,086(+107), 사망자 72(+5)     


영국 내 (집계가 확정된) 확진자 증가 속도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5월 더블린 여행 취소.

예측불가능함과 형형한 위험이 도사린 이곳에 누군들 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숙소 예약도 취소했다.

어쩌면 고민도 사치였다. 3월 휴가지였던 호워쓰와 요크를 오가는 기차들도 모두 취소됐다는 메일을 받았다.

고민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취소 건들이 우르르 몰려오리란 사실을 그날의 나는 알았을까.


퇴근했더니 매주 일요일, 세컨잡으로 일하는 크래프트브루펍의 제너럴 매니저 C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당분간 쉬프트 배당이 어려울 것 같아. 지금 상황으론 풀타임 바텐더들 시간 채우기도 어렵네. 언제 다시 괜찮아질지 모르겠지만 우선 지켜보자고.


반년 동안 목 빠지게 기다려온 휴가들과 일자리 하나가 우유에 씨리얼 말아먹듯 사라졌다.

그제사 어렴풋하던 실루엣이 선명한 그림자가 됐음을 알았다. '실감'이 시작된 것이다.



3월 15일 : Now, It’s War On The Virus

 UK 확진자 1,140(+342), 사망자 21(+10)

대한민국 확진자 8,162(+76) 사망자 75(+3)

     

잠을 거의 못 잤다. 마트 오픈 시간에서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모리슨에 입성했다.  

하루이틀새 사재기는 정점에 달했다. 클리닝 페이퍼의 품절 따윈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다. 이틀 전만 해도 조금씩 남아있던 파스타와 쌀, 밀가루가 아예 없었다. 식빵이나 베이글, 달걀도 없고 해바라기씨유나 포도씨유처럼 널리고 널린 기름도 없고 언제나 넘쳐흐르던 온갖 고기류도 없다. 유통기한이 긴 편에 속하는 플랜트 밀크와 먹을 만한 냉동식품도 품절. 그나마 남은 것은 금세 소진해야 하는 신선식품과 소스류 정도.

 

(좌부터) 결제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 / 신문 가판대 / 파스타, 라이스, 밀가루 섹션 진열대


아무튼 나도 괜히 조바심이 나서 당장 손에 닿는 바게뜨와 하인즈 통조림 양송이 수프와 켈로그 크런치넛 씨리얼을 챙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 끄트머리에 서서 사람들의 뒤통수를 멍하니 보다 썩은 웃음이 났다. 통조림 수프와 씨리얼이라니. 누가 공짜로 준대도 거절했을 것들을 손에 들고 안도감을 느끼는 꼴이라니. 전부 같았다. 사람들은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오만 잡다한 것들을 양손에 무겁게 들고 뒤뚱거리며 마트 섹션마다 이어진 기나긴 대열에 합류해 있었다.


거진 한 시간을 기다려 간신히 결제를 마치고 돌아서자 각종 잡지며 신문을 꽂아둔 좌판대가 보였다.

‘70세 이상 노인은 외출하지 말고 집에 머물기를 강력히 권고한다’고 쓰인 신문 헤드라인을,

일흔이 족히 넘어 보이는 두 노인이 등을 구부려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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