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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 Jan 09. 2024

우리 마음 속에 흐르는 역사

동학에서 촛불까지

1. 전봉준은 어떻게 농민들을 모았을까?     

갑오동학혁명 당시 농민들 수십만 명이 동학의 깃발 아래 모여 죽창 들고 쇠스랑 들고 전봉준을 따랐다. 꽹과리와 징을 든 풍물패가 따랐고 농민과 천민 가릴 것 없이 대열에 합류했다. 때로는 양반이나 중인, 아전들도 협력했다. 그것은 리더의 전략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모이기만 해도 탄압이 가혹하던 시절에 전봉준은 어떻게 그리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을까?     


관리들의 탐학과 삼정의 문란이 농민들을 추동했다. 농민들이 살기 어려워 유랑민이 되던 시절이었다. 소작으로 땅을 부쳐도 지주와 관에 세금을 내면 이듬해 농사지어야 할 씨앗으로 쓸 곡식도 지켜내기 어려웠다. 과거시험이나 벼슬길은 돈으로 해결되었고, 그것도 왕실 주도로 이루어졌으니, 나라가 얼마나 썩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벼슬 나온 관리들은 자신이 쓴 돈을 회수하기 위해 갈고리로 긁어댔다. 그럴 정도로 시스템이 붕괴되고 백성들은 살 길이 없었다. 그러니 농민들이 전봉준이라는 지도자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1862년 임술민란 때 전국 72곳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도 그것을 진압한 뒤 주모자를 처형하고 몇 사람을 유배 보내면 난리는 가라앉았다. 그런데 1894년(갑오년)에는 보국안민, 척양척왜, 광제창생 등 동학의 깃발만 보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고부봉기 때 8천 명이 모였고, 무장기포 때 2만 명이 모였다. 그리고 농민군이 백산으로 이동하고, 정읍의 황토재에서 승리하고, 장성의 황룡촌 전투에서 장태라는 신무기를 만들어 승리한 뒤 갈재를 넘어 완산칠봉을 파죽지세로 넘어 전주 풍남문에 입성했다.뒤늦게 홍계훈이 금구에 도착했으나 전봉준이 정부에 폐정개현안을 제시하고 청군이 아산에 모여들자 왕실은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농민군은 무장을 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농민군은 호남 52개소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보자. 전봉준의 가장 위대한 전략은 황토재에서 승리한 뒤 전주로 치고 올라가지 않고 장성과 영광으로 돌아가 호남 민중 전체를 들끓게 만든 점이다.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대나무로 만든 장태로 승리한 것도 승리한 뒤에는 파죽지세로 정읍, 태인, 원평, 금구를 거쳐 전주성을 함락했다. 거기서 서울까지 치고 올라갔다면 혁명을 완수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김개남이 말했고, 신동엽이 『금강』에서 신하늬의 입을 빌려 말했다. 그리고 훗날 사가들은 그게 마치 전봉준의 우유부단으로 그리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국이 아산에 도달하고 홍계훈은 관군을 대폭 보강했고, 농민군은 숫적으로 우세했지만 전투에 익숙한 병사들이 아니었다. 물론 관군의 화력에 동학군이 쓰러져도 농민들은 ‘닥치고’ 모여들었다. 거기서 어떤 이들은 3.1운동이나 4.19혁명, 6월항쟁, 촛불항쟁의 원형을 찾는다. 심지어 전봉준이 삼례에서 2차기포를 할 때 4천명이 모였다면, 논산에서는 2만명, 그리고 공주 우금티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에는 적어도 10만명 이상이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천안 세성산에서, 공주의 이인과 효포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모였던가?     


전봉준이 삼례에서 2차기포를 한 무모함을 따지지 말자. 그간 6개월간 집강소 정치라는 민관협치의 민주주의를 체험한 것은 민중을 열광케 했다. 전라도 53개소에서 집강소가 실시되어 집강소라는 지방자치가 실시되자 그것을 실현해 보지 못한 충청도와 영남지역은 난리였다. 그랬으니 김인배의 영호남도호소의 깃발이 휘날리면 하동과 진주의 농민들이 모여들었고, 최시형이 전봉준의 2차기포에 호응해 농민군을 모았을 때 충청도와 강원도에서 그 많은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심지어 우금티 전투에서 패한 뒤에도 장흥에서 수만 명의 농민들이 모여 석대들 전투를 벌였고, 최시형이 달아나던 북실 전투에서 그 많은 농민들이 모였다. 집강소를 실시하지 못한 지역에서 한 맺힌 농민들이 더 모여들었다.      


농민군 앞에는 보국안민, 척양척왜라고 쓰인 깃발이 날리고, 농악대와 풍물패, 그리고 사당패들이 뒤따랐고, 아예 광대부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 집단에 들어가면 모두가 평등하게 대접받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정과 포수, 사당패 같은 천민들이 모여들었다. 남원에서는 천민부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빗발치는 총탄 속을 죽여도, 또 죽여도, 아무리 죽여도 우금티고개를 치고 올라가는 동학농민군을 생각해 보라. 그들의 열망이 무엇이었기에, 꽹과리와 징소리에 맞추어, ‘시천주조화정’ 혹은 ‘궁궁을을’ 주문을 외며 그 고개를 치고 올랐을까.     

농민들은 전봉준의 비전을 공감했다. 전봉준은 한낱 농군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비판적 지식인’이었고, 전략과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혁명가였다. 그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자보를 쓰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고, 격문이나 궤서를 쓰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말하자면 그는 준비된 웅변가, 학습된 혁명가였다. 그는 벼슬하지 못한 양반(향반)이었지만 당대 최고로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말하자면 고부봉기나 무장기포는 그 이전에 동지들과 스터디하고 토론하면서 전략을 준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세의 학자들은 전봉준이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읽고 여민제를 연구했고,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읽고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지 궁리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실제로 강진에서 만들어진 『경세유표』 사본이 돌았고, 부안에서 만들어진 『반계수록』은 실학자나 양명학자들이 이미 관심을 갖던 저술이었다. 19세기가 시작할 무렵에 성호학파와 정약용 형제들은 천진암에 모여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학습하며 토론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봉준과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김인배, 차치구, 김도삼 등은 원평 집강소 부근(현재 정읍 지역)에 모여 살았고, 혁명 모의에 관여하며, 공부하고 전술과 전략을 짰다.      


그 시대에는 차츰 큰 장이 열렸다. 장에 사당패와 풍물패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 판소리 한마당도 열렸다. 「흥보가」에서 놀부를 골탕먹이는 장면, 「수궁가」에서 왕과 신하들을 조롱하는 장면, 「춘향가」에서 암행어사 출도로 변사또를 혼비백산 만드는 장면, 혹은 「적벽가」에서 전술적 대승을 거두는 장면 등은 백성들을 신나게 만들었고, 한글 『홍길동전』의 율도국 이상도 그에 못지않게 흥미로웠다. 그런 가운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과 같은 동학장수들이 배출되었다. 김개남은 급진적이었고, 손화중은 민심을 읽을 줄 알았고, 전봉준은 전략적 활동가였다. 그랬으니 봉기를 해도 이전과는 다르게 사람들을 안도시켰고, 질서를 유지했으며, 백성들의 자존감을 지켰다. 그들은 백성들을 혁명에 가담하게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을 모으기 쉽지 않았다. 농민들은 때를 놓치면 농사를 망친다고 생각했고 광범위하게 퍼져 살았지만 신분 파악하기가 더 쉬웠다. 그래도 전봉준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또한 이전의 지혜와 시행착오를 헛되이 흘리지 않았다. 30년 전 진주민란에서 유계춘이 가요를 이용해 민중을 모았고,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그런 방식을 활용하고자 『용담유사』를 노래로 만들었고, 심지어 「검가」를 만들어 민중들이 칼춤을 추고 신체를 단련하면서 웅대한 뜻을 품게 만들었다. 또한 호남에는 서학(천주교)을 믿는 자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았는데, 그로 인해 제국의 침략에 대한 반발이 심했고 새로운 이념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또한 그것을 접한 동학교도들은 우리만의 이념이나 종교가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자각했다.      


한편 동학의 포접제는 조직이 효과적으로 운영했고, 그로 인해 공주와 삼례, 보은과 금구집회를 성황리에 성공시켰다. 보은에서는 3만명이 모였고, 삼례나 금구에서는 전봉준의 격문이나 연설이 주효했는데 그것은 거의 서양의 민회에 준하는 형식이었다. 최시형이 익산의 미륵산 사자암을 찾았고, 심지어 전주와 원평을 거쳐 태인의 김개남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 가운데 호남의 동학교도는 따로 ‘남접’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전국 최강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최시형의 육임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학교도 중에서 뛰어난 지도자들이 쏟아져나왔고, 두레와 향회와 읍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리더들이 어느새 스타가 되었다. 사람들은 ‘전봉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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