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봉준과 동학장수들은 정읍에서 무얼 하며 놀았을까?
삼남길 따라 장성에서 갈재를 넘으면 정읍이다. 입암산과 방장산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입암저수지를 지나고 천원역 부근에 이르면 보천교 유적지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차경석이 동학과 증산교를 이어받은 보천교를 만들어 3.1운동과 임시정부, 청산리전투를 지원했다고 전한다. 그 앞에 서면 십리 길 앞에 두숭산이 보이고, 그 너머에 황토현전적지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 그것이 동학기념관으로서 전국으로 규모가 가장 큰 점을 보아서도 정읍이 동학의 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학혁명은 전봉준이 잡혀 죽음으로써 일단락되지만 이후에도 장흥의 석대들전투와 보은의 북실전투 등이 벌어지고, 그 뒤에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의병 창의에 힘을 보탠다. 그런데 동학농민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장수 5명이 갈재와 내장산, 그리고 칠보산과 상두산이 감싼 정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입암산에서 발원한 개천이 북으로 흘러 정읍천과 합류하고 나아가 만석보에서 동진강과 합해지는데, 그것의 영향일까. 북으로 흐르는 물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는 말이 전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반역자로 몰렸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이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전봉준의 비서실장 차치구가 입암에서 났고, 그의 아들 차경석이 그곳에서 보천교를 일으켰다. 차경석은 두승산에서 태어난 강증산이 만든 종교를 이어받아 입암에 보천교를 세운 것이다. 보천교에서 십리 남짓 떨어진 두승산 앞에서 고부봉기가 일어났고 두숭산 서쪽 감곡과 원평 사이 1km 남짓한 거리에서 전봉준과 김덕명이 살았다. 삼남길을 따라 정읍시청을 들러 동학장수들을 부조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성황산을 넘으면, 최경선 탄생지와 묘소가 나오고, 그 너머 상두산 자락인 태인 지금실에서 김개남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했다. 그렇다면 정읍은 온통 동학장수들의 놀이터다.
정읍은 130년 전에 태인, 고부, 정읍 세 개 군현으로 나뉜, 삼남길의 요충지이다. 입암산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내장산, 칠보산, 상두산을 거치면 모악산에 이른다. 남쪽으로 갈재를 넘으면 장성이고, 북으로 원평, 금구를 지나면 바로 전주이다. 거기서 삼례를 거쳐 익산, 논산, 공주, 천안을 지나면 서울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을 거꾸로 보면 유배자들의 고행길이 된다. 영남과 영동 산악지대에서 도망다니던 최시형이 평야지대로 나오기 위해 보은이나 옥천에서 거처를 정했다면, 호남에 진입하기 직전에 공주 가섭암과 익산 사자암에 머문 것은 거기서 호남을 내다보며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옥천의 청산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빠져나오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상주와 보은은 서울과 호서로 나아가는 진입로 역할을 했고, 최시형이 천안 목천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인쇄해 뿌렸으니, 동학의 사상이 순식간에 남쪽으로 퍼진 게 이해가 된다.
본래 호남은 전국 쌀 생산의 대부분을 책임지던 곳이지만, 또한 세상이 바뀌기를 간절히 바라던 열망이 강한 곳이다. 임술민란이 일어난 73개소 중에서 38개소가 호남이다. 도별로 볼 때 서학(천주교)을 믿는 자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았고, 정감록과 홍경래와 관련된 이상한 소문이 잘 돌았고, 모악산과 그 부근에서 수많은 종교들이 탄생했다. 동학이 호남에 전해져 농민전쟁으로 이어졌지만, 동학의 싹이 뭉개진 뒤에도 증산교, 원불교, 대종교, 통일교 등의 원리로 바뀌어 나타난 것이다. 모악산 자락에서 만들어진 종교가 우리 땅에서 만들어진 토속 종교의 대부분이라니 그 지역의 토양과 정신이 궁금하다. 그곳에서 새로운 어떤 정신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급속도로 확산된다.
정읍은 정극인이 만든 고현동 향약으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을 지니고 있다. 향회와 두레의 전통이랄까. 새것을 받아들이고 토론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모임을 통해서 시작된다. 어떤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의병 창의가 가장 많이 일어나고, 그것을 안 면암 최익현이 구한말 고현동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다. 의를 행하고 불의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향약의 기본 정신이다. 그것이 나라를 바르게 만든다는 ‘근왕(勤王)’의 정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편 정읍에서 백제 시대 가요인 「정읍사」가 출현했다.
“달아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치오시라.”
우리 머리 위를 비추는 ‘달님’, 그것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면,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시천주(侍天主)’의 하느님이 된다. 사람들은 가슴속에 달님 하나, 하느님 하나씩 품고 산다. 그것이 있어야 삶에서 바른 길을 찾고, 위로를 얻고, 때가 되면 행동하게 된다. 내 안의 하느님을 따라 그분이 시키는 대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서학이든, 동학이든 신도들은 각기 나름대로 하느님을 모시고 산다. 본래 우리는 하늘을 숭배하는 민족이다. 농기를 높이 들고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신명나게 노는 것도 그 하늘 아래서, 하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보천교가 수백만 명의 신도를 모은 것도 정읍을 중심으로 한 우도농악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한편 동진강이 발원하는 곳을 가다보면 무성서원과 정극인이 「상춘곡」을 읊은 원촌마을이 나온다. 그곳을 ‘고현 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시산리, 와우리, 무성리, 반곡리를 일컫는다. 무성서원은 최치원과 정극인을 배향한 곳으로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이다. 무성서원의 강당은 본래 정극인이 후학들에게 향약을 가르치던 향학당이었고, 현재 고현 향약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것은 마을 규약과 같은 것으로서 마을사람들 간에 상부상조하고, 유교의 예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그것이 실행되던 원촌마을은 호남에서 가장 중요한 선비 마을 중의 하나이다. 훗날 향약은 향회와 두레로 발전한다. 향약에서 공동체 정신을 배우며 마을의 이익을 위했다면, 향회에서 그것들을 추구하고 부당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 항의하는 방법을 찾아내기도 했다. 두레와 향회에서 장두는 민의를 모은 뒤 상부에 건의하는 역할을 맡는다. 향회의 대표자는 처음에는 유학자였으나 조선말 세도세력이 판치는 시절에 전봉준이나 손화중, 김개남 같은 비판적 지식인(향반 혹은 잔반)이 나서 그 역할을 맡았다. 실제로 고현 향약이 일어날 때 김개남의 도강 김씨는 그 일원이었다. 그것이 리회, 읍회를 거쳐 민회로 발전한다.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맑은 바람과 달 이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
「상춘곡」에서 명예와 부귀에서 초탈해진 유학자 ‘청풍’과 ‘명월’이 벗이 된다. 그러면 원촌마을 주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유학자가 소임을 다하는 것이 된다. 자연 질서에 순응하며 안빈낙도를 찾아 세속에서 기쁘며 성리학의 이상인 ‘리(理)’라는 초극을 이루게 된다. 그것은 초기 유교 이념을 성취한 것으로서, ‘초극’이란 ‘이(理)’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단계에 이르면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는 생명의 교류가 일어나고, 세속과 초월의 사이에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 500년 전, 퇴계와 편지를 나눠 유명해진 기대승은 서울로 올라갈 때마다 이곳 부근에 살던 일재 이항을 만나 가르침을 청하며 퇴계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여주며 토론을 벌였다. 남고서원 마루에 앉아보면 그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한편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같은 이들이 유배를 떠나 이 길을 갈 때 지역 유학자들의 배웅을 받고, 귀양길의 고통 속에서도 배움을 청하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그랬으니 그들이 유배를 가서도 지방의 지식인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다산은 엄청난 저술을 하고, 추사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길은 동학의 길이다. 나주, 장성, 정읍, 원평, 삼례에 수많은 동학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특히 정읍은 동학장수들이 태어난 곳이고 전봉준과 김개남, 김덕명 등이 이곳에서 소년시절부터 서로 만나 스터디하고 토론을 하고 후일을 도모했다. 정읍시 감곡면에서 원평으로 넘어가는 경계지대에서 전봉준이 살았고 원평의 동록개 집강소에 김덕명을 좌장으로 한 모임들이 자주 열렸다. 집강소 마루에 걸터앉아 그 부근을 둘러보면, 김덕명과 전봉준, 김인배의 생가들이 눈앞에 펼쳐져 그들이 얼마나 가깝게 살았는지 알게 된다. 전봉준은 원평의 서당을 다녔다. 게다가 태인의 김개남, 칠보의 최경선, 정읍의 손화중이 전주를 가자면 반드시 원평을 들러야 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을 독회를 열고 전략을 짜고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태인 지금실에서도 함께 살았고, 전주영장 김시풍에게 전술을 배우기도 했다. 김덕명 집 부근에 살던 김인배는 영호도호소 대접주로서 활약해 광양, 순천, 여수, 낙안은 물론 하동, 진주까지 장악했다. 통영의 박경리는 김인배의 활약상을 들으며 곧 다가올 해방, 동학의 시대에 꿈꾸었다고 전한다. 그랬기에 통영과 진주에서 살았던 박경리가 『토지』에 동학의 정신을 넣은 것이다. 동학장수들은 한결같이 상두산, 칠보산, 내장산, 입암산으로 이어진 정읍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뛰놀며 꿈을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