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봉준은 어떻게 민회의 스타가 되었을까?
130년 전, 갑오년에 주막이나 사랑방에 모여 수군거리는 농민들을 생각해 본다. 현대에는 유튜브나 카톡 메시지를 보고 태극기집회나 촛불집회에 사람들이 모이지만, 130년 전에는 기껏 시장통에서 여론을 수렴하고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렇더라도 흩어져 살던 농촌에서 수십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쇠스랑 들고, 혹은 죽창 깎아 들고 집회에 나선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의 여론 구조부터 알아야 짐작이 간다. 장성의 기대승이 안동의 퇴계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그 편지가 삼남길 따라 서울까지 갔다가 다시 인편을 거쳐 영남길 따라 안동까지 갔다. 그것도 정읍에서 일재 이항이 편지를 열어본 뒤 필사하고, 서울에서 박순이 편지를 읽고 대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면서 그 논의들이 공론화되면서 퇴계에 전해졌다. 정극인이 정읍에서 고현 향약을 만든 뒤 향촌의 선비들은 향회에서 여론을 수렴한 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수령에게 소장을 올렸는데, 그런 방식으로 지방의 여론은 만들어졌다.
송기숙은 『녹두장군』에서 ‘두레’를 통해 전봉준이 스타가 되었다고 설파한다. 서당의 훈장을 했던 전봉준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을 가르쳤을 것이라는 박태원이 『갑오농민전쟁』에서 보여준 추측도 충분히 타당해 보인다. 두레의 장두(영좌)가 되었건 서당에서 청년들을 가르쳤건, 전봉준은 사람들의 피를 끓게 했고 수십만 명의 리더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것의 바탕은 향약과 향회의 전통에서 나왔다.
정읍은 550년 전 고현 향약이 만들어져 한번도 끊기지 않은 채 지속된 곳이다. 고현 향약은 지금으로 말하면 고현면에 해당되는 시산리, 와우리, 무성리, 반곡리 등 4개의 마을에서 실시했는데, 그 자료가 보물 1181호로 지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고현 향약이 처음에는 영광정씨, 경주정씨, 여산송씨, 도강김씨, 청도김씨 등 양반과 향반 중심이었는데, 향반이란 ‘몰락한 양반(삼대째 벼슬을 내지 못하는 양반)’을 일컫는 말이라면 아테네의 ‘귀족 민주주의’와 비슷하다고 할까. 훗날 향약에 중인과 천민의 가입을 단계적으로 허용했는데, 3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엄격한 규칙 속에서 서로 제안하고 토론하며 마을 공동체를 위해 일했다. 여기서 향회와 두레, 촌계(村契)가 발생하고 그것이 우리 지방자치의 원형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향약을 통해 교육을 받고 함께 일하며 놀이문화를 즐겼다.
그런데 향촌에 대한 고을 수령의 횡포가 나타나면 대표가 사람들의 뜻을 모아 수령에게 항의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럴 때 향회의 리더는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된다. 물론 조선 후기에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무너지고 탐관들이 설쳐대자, 그것에 반발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지경에 이르자, 사족들이 향회의 대표로 나서는 일을 꺼렸고, 자연스럽게 향반 중의 누군가가 대표가 되었다. 그것은 마을의 촌계[洞契]나 두레로 형태가 바뀌기도 했는데, 송기숙은 『녹두장군』에서 전봉준을 두레의 스타로 만든 것이다. 정읍의 고현 향약의 전통에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은 향반 출신이었다. 그들은 향반과 중인, 나아가 천민까지 아우른 향회의 스타였다. 두레가 하나의 마을 중심으로 모내기와 추수 등 노동의 조직이었다면, 너댓 개의 마을을 모은 리회나 읍회가 열렸고, 마침내 그것은 민회로 발전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로 농민들의 두레는 둔전병(屯田兵)의 ‘농군’의 형태를 취했다. 이순신 장군 아래서 농사를 짓고 거기서 벌어들인 것으로 먹고 훈련하며 배와 무기를 만들던 조직의 탁월함을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이앙법이 도입되면서 군인처럼 단합해야 모내기를 하고 추수하며 생산력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두레에서도 농기를 세우고, 농악(두레풍장)을 통해 흥을 돋았는데 그것도 모두 군대의 형식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쓰여진 농기를 사수하고, 징, 북, 꽹과리 등으로 풍물을 치면서 농민들은 전투에 임하듯 일했다. 그때 농민은 향촌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 형식이 갑오년에 ‘보국안민’, ‘광제창생’, ‘척양척왜’라고 쓰인 농기를 들고 길농악의 신명 속에서 나라를 바로잡자고 나선 것이다. 이순신 장군(정읍현감 역임)을 충렬사에 모신 정읍에서 농민들이 둔전병처럼 단련된 것도 그런 기세를 갖게 했을 것이다. 호남의 둔전병이나 의병의 전통 속에서 농민군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학 접주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농기를 앞세우고 모를 심는데 선소리꾼은 북을 치며 농가를 선창하고, 남녀 농군들은 팔다리로 춤추며 일을 한다.”(1898)고 기록했다. 논의 주인은 두레의 장에게 청해 일꾼들을 교섭하고, 뭔가 문제가 있을 때 반드시 장두와 교섭한다. 농민이 주체가 된 향도(香徒)와 향회와 두레의 리더는 발언권이 세지고, 당대의 비판적 지식인이었던 전봉준과 같은 향반이 최고의 스타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귀족제 민주주의였던 향약은 민중까지 포함하는 대의 민주주의로 형태를 바꾼다.
퇴계보다 두 살 나이 많은 일재 이항은 정읍에 뿌리를 내렸는데, 서경덕과 율곡 사이에서 ‘기(氣)’ 중심의 일원론을 내세우며 실천을 강조했다. 그것은 호남의 근왕(勤王) 정신의 뿌리를 이루었고 김천일과 같은 의병장을 배출했다. 동학도 크게 보면 기(氣) 속에 리(理)까지 다 들어있다는 기 중심의 대중유학이다. 동학에서 자기 내부에 하느님을 모신다는 사상은 “자기의 私欲을 이겨내고 다시금 天理를 회복하게 된다”는 이항의 논리를 변형시킨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그런 전통에 익숙하던 농민들은 더욱 쉽게 동학사상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전봉준은 유학의 토대가 허물어진 상태에서, ‘기(氣)’ 중심의 새로운 학풍이 아니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학은 나라의 시스템을 뜯어고치고 충효를 바탕으로 한 바른 세상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지녔다.
정극인의 고현 향약과 일재 이항의 성리학의 논리에 익숙한 정읍 사람들은 의병 창의에 익숙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백성이 일어났는데, 고현향약에서 가장 중요한 덕업상권(德業像勸, ‘좋은 일을 서로 권한다, 도의를 실천한다’)을 원형 삼고, 환난상휼(患難相恤)로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는 정신으로 의병 창의에 나섰던 것이다. 18세기 중반부터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출현했는데, 한편에서는 시장이 형성되고, 장터에서 탈춤, 사당패, 판소리 한마당이 열리고는 했다. 거기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 폭로되었지만, 성군인 정조는 백성의 목소리가 임금에게 들릴 수 있는 격쟁과 같은 것들을 허용하고, 북학파는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소리치고 정약용과 성호학파는 대안 찾기에 몰두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독회하기도 했다. 정조가 죽은 뒤 19세기에 들어서서 세도세력의 전횡으로 삼정이 문란해지고 생산력 향상의 기회를 놓치자 국운이 쇠퇴한다. 홍경래란이 일어나고, 김삿갓이 썩은 사회를 풍자하며 방랑하고, 청나라는 아편전쟁으로 봉변을 당하고 그 뒤로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했다.
그런 시대에 최제우는 1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가톨릭(서학)의 도래와 판소리와 「홍길동전」 등의 소설을 통해 사회 비판 의식이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마침내 임술민란이 터지는 것을 보면서 최제우는 남원의 교룡산성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완성한다. 호남은 임진왜란 때 가장 강력한 의병들이 활약했고 둔전병이 바다를 지켰던 곳이고, 임술민란 때 전국에서 가장 많은 봉기가 일어난 곳이다. 최시형이 익산 미륵산 사자암에 자리잡고 전주, 원평, 태인 등을 방문하자 동학교도가 들불처럼 늘어났다. 호남은 언제나 새로운 사상, 나라를 구할 사상을 기다리는 곳이었다. 최제우가 신분 해방을 도모하고, ‘개 같은 왜적놈들’이라고 제국주의를 거부하고, ‘다시 개벽’을 외친 서적과 노래가 들어오자 몇 년만에 호남은 동학 천지가 되었다.
전봉준은 원평 부근 감곡(정읍)에서 살 때 김덕명, 김개남, 최경선 등과 모여 『동경대전』과 『경세유표』를 읽으며 토론하고, 임술민란과 갑신정변의 실패를 되돌아보고, 전술과 전략을 짰다. 그는 최제우의 사상을 흡수하고, 포접제의 점조직을 활용하며 사람을 모았다. 최시형의 리더십은 민중의 편에서 민중을 올바른 길로 안내했고, 전봉준은 민중이 원하는 것을 얻고 배분할 줄 알았다. 최시형은 육임제를 만들어 동학의 조직을 더욱 체계화했고, 신도들은 예절과 위생, 그리고 대민에서 찬사를 받았다. 최시형의 공주취회가 성공하자 전봉준이 뒤따라 삼례집회를 열었고, 최시형의 보은 장내리 집회가 성공을 거두자 곧바로 금구와 원평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삼례와 금구의 집회는 최시형을 만나러 공주와 보은을 찾아가던 남도의 동학교도였다. 그들의 안타까움을 중간 지역에서 풀어준 것도 전봉준의 리더십이었다.
동학은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이념이었다. 신분타파로부터 시작해 향약과 두레에서 민회로 발전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거기에 있었고, 동학교도들은 「안심가」를 부르며 ‘다시 개벽’을 꿈꾸었고, 「검가」를 부르며 신체를 단련했다. 어디 그뿐인가. 동학은 신세계에 대한 믿음을 주고 실천의 논리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신도가 아니라도 『용담유사』의 가사를 외었고, 전봉준이 쓰는 괘서와 통문, 격서, 상소문을 읽으며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어떤 유학자의 발언보다 통쾌하면서도 미래에 희망을 걸게 했다. 갑오년에 전봉준은 ‘고부 봉기’ 직후 ‘동도대장’에 이르렀다. 그것은 정읍의 토양에서 그보다 앞서 동학을 받아들인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이 그를 받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로 인해 본격적으로 혁명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전봉준은 준비는 치밀했다. 촌계가 열리는 대보름날 무렵에 고부봉기를 일으켰고, 향회가 열리는 농한기에 무장기포를 했다. 임술민란 때부터 통문(通文, 알리는 글)으로 여론을 일으키고, 향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하고, 그 뒤에 수령에게 읍소(邑訴)하고, 관찰사에게 청원하는 의송(議送)의 방식을 거쳤는데, 진주민란의 유계춘도 향회를 통해 9개의 동네 주민들을 모아 봉기를 했다. 무장기포에서는 이미 수십 개의 동네 주민들이 힘을 합했다. 전봉준은 무기를 구입하고 군량미를 어떻게 준비할지 계획을 세웠고, 황토재 전투를 승리한 뒤에는 남도 전체의 민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영광, 장성, 무안 쪽으로 우회하는 전술을 쓴다. 장흥의 이방언과 수많은 남도의 접장들이 호응했고, 이방언의 장태(대로 만든 무기)로 황룡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쯤 되니 최시형과 손병희의 동학의 본부에서도 전봉준의 봉기를 추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