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 함께 비를 맞아본 적 있나요?
<한 사람 만큼 넓어진 길>
살면서 기억하는 비 오는 날 중에 가장 선명한 날이 있습니다. 중학생 때였어요. 버스에서 내렸는데 탈 때보다 비가 훨씬 세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았기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으니 집까지 가려면 홀딱 비에 젖을 것이 뻔했습니다. 자포자기 상태로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그때 말없이 우산 하나가 나를 가려주었습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남자 어른이 말했습니다. “같이 써요.” 어디까지 가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약 5분 정도를 걸어야 했습니다. 친구와도 편치 않은 것이 한 우산인데 낯선 사람과 함께 우산 아래 걷는다는 게 무척 어색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5분이었다고나 할까요. 모퉁이 앞에서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는 뛰었습니다.
더 어릴 때에도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부모님이 학교로 우산을 가져다 준 적은 없었습니다. 하교 시간 교문 앞에 서서 아이를 기다리는 어른들을 보면서 저 중에 왜 우리 엄마는 없는가에 대한 서운함은 가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서운함은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날의 기대하지 않았던 우산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때의 일을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기억한다 해도 나만큼 의미 있게 떠올리지는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만해도 내가 누군가에게 건넨 선의와 공감은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그 순간 상대에 대한 나의 최선 혹은 차선이었을 것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은 것이기에 굳이 기억에 갈피를 끼워 넣을 필요가 없게됩니다.
나의 가족, 친구, 애인, 그리고 지인들 중 누군가는 나에게 받은 어떤 선의와 공감을 소중히 간직해줄 수도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감사히 받았던 그것은 차분한 말이었을 수도, 온전한 침묵이었을 수도, 다정한 포옹이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따뜻한 밥 한 끼였을 수도, 보조를 맞춘 가벼운 산책이었을 수도 있을 테지요. 나는 그것을 ‘조건 없는 환대’라고 말합니다.
닫혀 있던 마음을 여는 것, (험난할 걸 알지만) 세상에 한 발 내딛는 것, 다시 일어나는 것. 조건 없는 환대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할 수 있게 됩니다. 환대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울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습니다. 선뜻, 흔쾌히 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상대에게 가닿는 공감이 될 것입니다. 때론 연습도, 다짐도 필요할 겁니다.
나 손을 내밀면 놀라지 말고
날 말없이 일으켜줄래요
나와 잠시 함께 길을 걸어요
한 사람 만큼 넓어진 길을
<얼음 꽃>이라는 노래의 마지막 가사입니다. 가수 아이유와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가 함께 부른 곡입니다. 노래가 조건 없는 환대를 선뜻, 흔쾌히 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내가 내민 손 덕분에, 누군가에게 건넨 우산 덕분에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만큼씩이라도 점점 더 넓어진 그 길을 우리는 모두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