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았나요?
<책을 펼치면 글자들이 줄줄이 실이 되어>
구본형 작가는 미궁과 미로의 차이를 독자에게 직접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순순한 독자로서였을까요, 친절한 저자로서였을까요. 홍승완 작가가 바로 뒤이어 그 둘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둥글고 각진 두 개의 이미지는 직관적으로 뇌에 박힙니다. “미로가 혼란과 분열의 연속이라면, 나선형 경로와 중심을 품은 미궁은 치유와 부활의 여정을 상징”(p.124) 한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우선 내가 헤매고 있는 곳이 미궁인지 미로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미로라면 미궁으로 바꿀 수 있는지도 관건입니다. 그러나 미궁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미궁 역시 빠져나와야 할 길임은 분명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같은 것인데 은유를 풀어보자면 용기, 자존감, 멘토링 같은 것일까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살면서 겪은 어려움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꼭 행복했던 기억 만큼일 겁니다. 물리적인 난관과 정신적인 고난이 적절히 배합됐죠. 과도한 염려에 빠지기도 하지만 긍정을 끌어올리는데 일가견이 있는지라 대부분의 미궁에서 스스로 잘 빠져나왔었습니다. 돌아보니 가장 어두웠던 미궁은 엄마를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최근 『분노와 애정』이라는 책을 접했습니다. 엄마와 작가(일) 사이를 바라보는 여성 작가들의 시선과 심정을 담은 옴니버스 에세이입니다. 도리스 레싱, 앨리스 워커, 낸시 휴스턴 등을 포함한 16명의 작가들은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서 겪은 자포자기, 분노, 끝없는 번뇌 등을 써냈습니다. 몇몇의 작가는 출산을 거부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20세기 중후반의 글입니다. 그러나 2023년 현재 우리나라 여성들이 직면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일하는 여성들은 의례 육아와 일의 양립을 꿈꾸지만 일면 지레 포기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 혹은 마음이 바로 그 결정체입니다. 이럴 때 여성들은 길을 자주 잃습니다. 아니, 잃었다고 느끼고 혼돈에 빠집니다.
나 역시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이전과는 많은 부분 변화가 생겼습니다. 먼저 직장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고 따로 출산 휴가가 있는 환경이 아니다보니 말 그대로 경력이 단절되었습니다. 나는 육아와 살림을 도맡는 것에 충분히 만족과 보람을 느끼나?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두는 내 선택이었습니다. 육아와 살림을 함께 하는 남편은 든든한 동반자였고 물심양면 도움을 주시는 친정과 시댁 어른들께 역시 감사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일 하고 싶은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엄마’라는 역할뿐이었습니다. 해서 결심합니다. 두 아이에게 각각 36개월간 내 시간을 오롯이 맡기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만 세 살을 넘겨 기관에 맡길 수 있을 때까지 8년이 흘렀습니다. 일할 수 있는 서울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었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졌거나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전 직장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을 다시 시작하려니 모를 때보다 더 큰 두려움도 앞섰습니다. 그때 손에 잡은 것이 책입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그림책이 점점 줄면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찾았습니다. 책모임을 통해 사람도 만나고, 숨 쉴만한 대화를 하면서 내놓을 글은 아니지만 서평을 썼습니다. 읽고, 말하고, 쓰는 활동을 통해 잠시 작아졌던 내가 다시 성장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출산과 육아로 사라졌다고 여겼던 30대가 다른 의미로 되살아났습니다.
책은 저자들이 펼쳐내는 수많은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책모임은 나와 ’다른’ 시선을 긍정하고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해주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머리로만 알던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보려는 의지를 일깨웠습니다. 이만하면 책은 나에게 분명한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할 만합니다. 돌아보면 미궁을 빠져나올 아리아드네의 실은 누가 “옛다!”하고 던져주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걸 알아볼 수 있는 감각을 키우는 일 역시 삶의 일부가 아닐까요. 나는 오늘도 혼자 혹은 함께 책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