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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May 24. 2024

남편과 자유연애

결혼 전, 참은 내게 물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아느냐고.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애인들과 만나며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런 자유연애를 지향하면 어떻겠냐고. 더도 덜도 말고 30년, 대한민국에서만 살았던 나에게는 적잖이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헌데 따지고 보면 그도 외국에서 살았던 적은 없었다.

당시 황당한 와중에도 그가 선전포고 격으로 터뜨린 폭탄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분명 순도 100%의 진심이었던 그것은 ‘본인이 다른 사랑에 빠져도’라는 만약과 그런 상황에도 ‘거짓말이 귀찮아서’라는 단순하고 나태한 성향인 자신을 잘 알고 사랑하는 이를 존중하려는 제안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발끈까지는 않았겠지.  

나는 참에게 반문했다. 서로를 구속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책임감 문제가 아니겠느냐고. 사랑은 그렇다 쳐도 신뢰는 상호간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참이 온전히 납득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고 우리는 결혼했다. 그리고 15년 간 그때 나누었던 대화는 잊고 지내다시피 했다.

얼마 전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책 대화를 나누던 자리에서 어떤 이가 그의 자유연애 일화를 꺼냈다. 참이 ‘자유연애’를 언급했던 그날의 공기와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왜 그를 반대 방향으로 설득했던 걸까. 당시 나는 우리 둘 사이의 책임감과 신뢰를 들먹였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나도 자유연애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족들, 지인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입방아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의 자유의지에 앞섰던 것이다. 내 삶에 켜켜이 쌓인 관습에 맞설 용기도, 수시로 다수에게 이해를 요청해야 하는 소수자의 삶을 지켜갈 뚝심도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사랑이란. 고민을 털어놓는 것, 존경하는 것, 닮고 싶어지는 것, 위로를 받고, 위로를 줄 수 있는 것 등이다. 이 모든 것을 한 사람과 할 수도 있지만 각각 다른 사람과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해왔다. ‘우정’이라면 문제없을 그것이 흔히 오늘부터 1일과 같은 ‘사랑’이라면 용납되지 않으니 표현하지 못했을 뿐.

그러고 보니 나의 결혼생활은 일부일처제하고도 대한민국의 결혼문화에 충실히 작동하며 평탄하게 유지해 왔다. 위에서 말한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조금씩이라도 참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비율은 이전과 크고 작게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심지어 의도하지 않은 정기적 다툼과 적절한 화해마저도 평안의 일부로 편입됐다.  

그럼에도 한결 같은 참은 우리 사이에 격변이 일어나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떠나겠다면 붙잡지 않을 것이며, 일부라도 그에게 남고 싶다면 그러라고 할 것이다. 이제는 나 역시 거리낌 없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그것이 사랑이며 존중이라고 우리는 자연스러운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전에 한 친구가 황혼 이혼을 계획 중이라면서 ‘너는 남편과 사이가 좋아서 (실은 나쁘지 않은 것인데) 좋겠다’고 부러움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 역시 퍽 불안정한 상태라고 답했다. 내 결혼생활은 ‘나의 사랑’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그 사랑이 끝나면 명백한 끝이 되는 것이라고. 알 수 없는 그 끝이 불안하다고.

그런데 결혼 15주년을 앞두고 ‘자유연애’ 화두를 복기하며 나는 끝을 알 수 없었던 결혼생활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의 나의 비겁함을 대면하면서 사랑을 재고하고 서로에 대한 믿음을 (나만 이제서야) 재확인했으니 말이다. 이제 ‘연애’ 앞이 아니라 ‘나와 그’ 앞에 <자유>라는 단어를 놓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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