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앞두고 둘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내년 계획을 하나 세웠어.” 달뜬 아이의 목소리가 반가워서 눈을 반짝이며 궁금해 하니 “왼손으로 글씨를 예쁘게 쓰는 거야!” “으응? 오른손으로 하면 안 되는 거야?” “오른손으로 안 되니까 왼손으로 도전하려는 거지.” 엉뚱하고 순진한 그 계획이 귀여워서 웃었는데 열 살짜리 아이의 진지한 표정에서 제법 중요하고 대단한 도전임이 느껴졌다. 책상에 널브러진 열 칸 노트를 보니 왼손으로 쓴 듯한 ‘ㄱ’이 한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릴 적에는 신년 계획을 꽤 진지하게 세웠었다. 13살부터 다이어리를 쓰면서 맨 앞장을 계획으로 채우는 게 무척 신나고 재밌었다. 하지만 계획을 다 실천하기는커녕 12월까지 다이어리를 다 채우지도 못하는 때가 많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그저 새 다이어리를 장만한다는 설렘으로 신년을 맞이하곤 했다. 보신각 타종을 (실제로든 티비로든) 지켜본 일도, 1월 1일 해돋이를 본 적도 없으니 오로지 새 다이어리에 대한 설렘이 새해맞이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1월 1일은 이전 해 12월 31일의 다음 날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숫자의 쳇바퀴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마법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일 테다. 십진법에서는 9 다음 10의 자리 수로 넘어간다. 헤아리기 좋게 숫자 위에 숫자를 쌓아가며 0부터 9까지 반복하는 체계가 당연한 우리는 무척 많은 것을 숫자로 치환해 살아간다. 시간과 달력을 지배하는 12진법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지구가 자전하는 것, 태양을 공전하는 것도 주기로 만들어 우리는 시간을 나누고, 또 나이를 매긴다.
해가 바뀐다는 기대감이나 설렘은 의식하지 않은지 꽤 됐다. 나이를 먹는다는 실감에서 아쉬움이나 후회를 품은 적도 크게 없었다. 하지만 새해에 대한 의미부여가 의미 없다고 회의하지는 않는다. 무언가 새롭게 혹은 다시 시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인간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 같아 용하다는 생각도 든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렇게 다시 1월 1일로 돌아와 삶을 리뉴얼한다. 둘째 아이는 내 웃음과 표정에서 당황스러움을 읽어내고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엄마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더라.”
그래, 새해는 나이뿐만 아니라 마음도 먹는구나. 아이를 따라 나도 계획이란 걸 하나 세워본다. 만년필로 끄적이기. 4년 전에 면세점에서 나름 저렴한 만년필을 하나 장만했었다. 만년필이라는 게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필기감을 잃게 마련인데 아주 드문드문 꺼내 쓰다 보니 잉크가 잘 안 나와 이면지에 잔뜩 낙서만 하고 다시 펜꽂이에 넣어버리기 일쑤였다. 8개들이 리필 잉크를 두 통 장만한 것도 1년이 훌쩍 넘었는데 이제 겨우 2개를 썼다. 2024년에는 리필 잉크 추가 구매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