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달 april moon Jan 27. 2022

나의 키다리 아저씨

『키다리 아저씨』 | 진 웹스터 | 허윤정 옮김 | 더스토리


키다리 아저씨의 실제 키는  센티미터일까? 어릴  나의 이상형은 키가  사람, 그리고 글씨를  쓰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왼손잡이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는데 살면서 그런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고아원을 떠날 때가 되었지만 아직 남아서 어린 원생들을 돌보는 제루샤 에벗. 그는 키다리 아저씨라는 후원자 덕분에 대학에 가게 된다. 그가 예뻐서, 혹은 고아원 일을 잘 해내서가 아니다. 제루샤 에벗은 영문학 성적이 우수했고 그에게 작가로서의 재능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단 후원자를 누군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 그리고 매달 ‘존 스미스‘라는 이름(가명) 앞으로 감사의 편지를 보낼 것이라는 조건이 달렸다. 약속대로 제루샤 에벗은 대학에 다니는 동안 키다리 아저씨께 편지를 쓴다. 그간 그는 많은 배움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쌓았고, 제루샤라는 묘비명에서 따온 이름을 ‘주디’라고 스스로 바꾸었다. 주디는 계속해서 아저씨의 정체를 묻지만 답장은 비서를 통해서 필요한 순간, 간략하게 전달될 뿐이었다. 결말에서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가 드러나는데 전혀 극적이지 않음에도 독자들은 설렘을 느끼기 충분하다. 마지막 편지가 연애편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 처음으로 주디를 만났고 어릴 적에 방영됐다는 만화영화도 본 적이 없다. 『키다리 아저씨』라고 하면 한 소녀(그가 고아인 줄도 몰랐다)를 후원해주는 아저씨의 키가 크다는 정도였다. 책을 읽으면서 실소하고 놀랍기도 했던 이유는 바로 10대의 나 자신 때문. 교원대학교에서 실습을 나온 화학 교생 선생님께 호감을 가지고 편지를 줄기차게 보냈던 나의 열여덟이 절로 오버랩됐다.

그는 키가 193cm라고 했다. 그렇게 키가 큰 사람의 실물은 처음 보는 거였다. 농구나 배구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키인데 너무 말라서 근력은 전혀 없어 보였다. 뿔테 안경은 그가 공부만 했을 것 같아 보이는 화룡점정이었다.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는 여고생들에게 그는 ‘남자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거든 등산을 가라.’고 자신의 경험담을 살짝 섞어 들려주었다. 체력적으로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 본성이 나온다나.

두 달 간의 교생실습 기간이 끝났다. 그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했고 다른 교생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편지를 하라며 학교 주소를 알려주었다. 의례적인 말이었을지 모르는데, 편지라 함은 그저 한두 번 안부를 묻고는 각자의 삶으로 서로를 잊어가는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한 것이라고 찰떡 같이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나는 꽤 자주 편지를 썼다. 그가 학교를 떠난 여름부터 겨울까지 꽤 많은 분량이었다. 열흘에 한 통, 봉투 하나에 3~4회 분량으로 편지지가 열 장 이상은 들어갔다. 묶음으로 파는 유선 편지지에 흰색 봉투. 여고생이 쓸 법한 연애편지의 모양새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기였다. 늘 수취인 없는 편지 형식으로 일기를 썼는데 누군가 읽어줄 일기를 단정하게 썼던 것이다. 딱 두 번 답장을 받았다. 글씨가 정말 환했다. 하지만 편지 쓰기를 곧 그만두었다. 그가 더 이상 보내지 말라고 했던 건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문득 치기 어린 고등학생의 넋두리가 민폐가 되리라는 자각이 있은 후였다.

『키다리 아저씨』를 읽으며 못내 궁금했다. 화학 교생 선생님은 이 책을 읽었던 걸까? 혹시 나의 편지가 주디를 흉내 낸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랬더라도 지금에 와서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왠지 민망한 웃음이 났다. 물론 너무 다르다. 나는 주디처럼 위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런 글 솜씨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선생님은 후원자가 아니었고, 또 연애편지로 이어지지도 않았으니까. 칙칙한 일기는 역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러고 보면 주디의 편지가 100년이 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10대의 나와 대척점에 있을 것이다. 대학생활의 활력과 고단함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 고아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부자인 친구들 사이에서 고뇌하면서도 스스로를 멋지게 다잡는 솔직함, 자신을 예쁘다고 말하는 자신감까지! 주디는 냉소적이고 염세적이며 회의론자였던 나의 10대와 전혀 다른 재질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흥미롭게 봤던 부분은 주디가 자신을 형용하는 말이었다.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정치에 푹 빠진’ 등 주디의 감정과 관심사를 적절히 표현해주는 그 말을 예전에 알았다면 꼭 써먹어 봤을 텐데!

투표권이나 사회주의자 등의 언급이 특별한 점도 있었다. 1912년 『키다리 아저씨』 출간이 1920년 미국 내 여성의 선거권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의 생활은 크게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주디가 작가로 살면서 가정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지점이 그 반증이다.

작가  웹스터는 나이 마흔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우리나라 작가 박완서 씨는 마흔에 등단했다고 했는데.  웹스터가 오래 살았다면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흥미롭고 의미 있는 책을    있었을까? 작가의 작품을  만날  없는 아쉬움 뒤로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언급하는  목록이 떠오른다. 『데이비드 카퍼필드』, 『로빈슨 크루소』, 『제인 에어』, 『작은 아씨들』 등등. 흔히 필독서, 교양서라고 하는  책들을  읽어볼 참이다. 키다리 아저씨 같은 후원자나, 멋진 첫사랑을 만날 나이는 훌쩍 지나버렸지만 적어도 주디처럼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멋진 중년은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