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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Apr 12. 202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리베카 솔닛 | 창비


한때 해방의 용어였던 페미니즘은 이기주의와 과격의 이미지를 쓰게 되었다.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으로 말문을 여는 화법이 일상화했다. (p.231 옮긴이의 말) 


뜨끔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다. 누구보다 성평등을 주장하고, 인권 문제에 열정적이면서 말이다. 자신의 의견에 대해 나의 주관보다는 남들의 (굴절된) 객관에 힘입고 싶었던 걸까?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라는 말의 오염이 나의 신념까지 물들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반면 남편은 달랐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책 얘기를 시작해보기 위해 남편에게 운을 뗐다   


“당신은 페미니스트야?”

“그렇지. 여성과 남성의 권리와 기회가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남편의 대답을 듣고 한 번 더 뜨끔했다. 물론 그의 입에서 “여자가...“와 같은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이미 예상하긴 했지만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라니. 그와 나의 간극이 무안해졌다. 나는 페미니스트와 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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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체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전선이다. (p.24~25)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작가, 리베카 솔닛의 경험담으로 시작한다. 그 일화란 한 파티에서 ‘마이브릿지’라는 화두에 한 권의 책을 언급하는 주최자와 작가의 대화였다. 책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남성은 솔닛의 친구가 서너 번이나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라고 말했을 때에야 사태를 파악했다. 저자 앞에서 책에 대해 알은 체를 한 꼴이라니 요즘 표현대로라면 제대로 이불킥 감인 셈이다. 책을 쓴 사람이 여성이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데서 벌어진 상황이었다. 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가 아예 책은 읽지도 않고 몇 줄의 서평을 들떠본 뒤 잰 체 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글(2008년)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이들로부터 즉각 반응을 얻었고 <mansplain>이라는 신조어 탄생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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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p.45) 


왜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려하기는 커녕 늘 가르치려는 걸까. 뿌리는 관계의 종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젠더 문제를 논할 때 ‘종속’이라는 개념은 대단이 중요하며 위험하다. 민주주의를 추구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 시민은 성인 남자였다. 여성, 어린이, 노예는 시민인 남자의 소유일 뿐이었다. 소유는 권위를 부여했고, 그 권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시대를 통틀어 지속됐다. 19세기 들어서야 ‘남성’을 제외한 이들을 위한 해방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을 강화하자는 운동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관습의 관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전히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대다수가 여성이다. (책에는 미국의 통계가 자세히 등장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2019년 대검찰청 범죄분석에 의하면 피해자 중 여성비율이 강력범죄 83.1%, 성폭력 87.3%, 가정폭력 85.5%로 집계되었다.)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부부강간 등의 가해자인 남성의 진술을 보면 ‘왜 나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 거야?’, ‘지금 내가 섹스하고 싶은데 왜 반항하는 거야?’ 등의 관념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내 맘대로 하고 싶은데 안 되네?’ 같은 심정은 유아기의 특성과 비슷해 보인다. 권위는 그렇게 유치하게 시작하지만 참담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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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운동은 남성의 힘과 권리를 침해하거나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마치 한 번에 한 성만 자유와 힘을 누릴 수 있는 암울한 제로섬 게임인 것처럼. (p.60)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근로환경 개선과 참정권을 요구한 시위를 기념해 1977년 유엔은 공식적으로 《세계 여성의 날》을 지정했고 우리나라는 2018년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얼마 전, 3월 8일. 각종 매체에서 여성의 날이 비중 있게 다루기도 했고, 크고 작은 단체나 업종에서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그런 온라인 사이트마다 ‘왜 남성의 날은 없느냐’는 댓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래 어디 한 번 그런 날이 생기도록 좀 바꿔볼까?’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여성해방이야 말로 남성성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폭력으로부터 남성 역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라고 이성적으로 달래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젠가는 “옛날에는 《세계 여성의 날》이라는 기념일이 있었다지 뭐야?”와 같은 후일담조차 의아해질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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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p.125)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의식적으로 읽지 않았다. 큰 아이 학교 학생들에게 성교육 그림책을 읽어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성교육과 페미니즘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를 가지고 자료조사를 하고 강의도 들었던 적이 있어서 굳이 책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해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이란 책을 읽고 그의 다른 저작이 궁금했지만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열외였다. 서평모임이 아니었으면 끝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나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함임을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리베카 솔닛의 적절한 예시와 적확한 문장은 감탄을 자아냈고, 페미니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내 신념을 공고히 했다. 앞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다른 책에도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잘 유도당한 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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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군데군데 이정표가 있기는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제 나름의 속도로 걷는데다가 어떤 사람들은 뒤늦게 합류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진하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려고 하고, 심지어 소수의 사람들은 역방향으로 행진하거나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한다. (p.206) 


물론 나 하나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을 한다고 드라마틱한 변화가 펼쳐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길의 이정표를 잘 닦아 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하고, 어떤 때는 또 다른 이정표를 세울 수 있으리라고 매일 매시간 스스로를 일깨울 것이다. 페미니스트인 남편과 사는 것이 행운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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