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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Jul 24. 2023

사월글방 - 마음편지1

당신의 장작은 무엇을 위해 타오르고 있나요?

<책이라는 화력>

며칠 전 다이어리를 펼쳐 일정을 확인하는데 옆에 있던 지인이 흘깃하며 “누가 보면 해외 무역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무슨 스케줄이 그리 빡빡해?” 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과장 섞인 말이었지만 주말에도 쉬는 날이 거의 없어 그렇게 보일만도 했습니다. 그날 밤, 스케줄 목록을 따로 정리해봤습니다. 앞에 서는 강의, 참여하는 교육, 책모임, 회의 주관 등을 포함해 대략 스무 가지였습니다. 그중 ‘책’으로 연결된 일이 2/3 정도를 차지했습니다. 현재 내 인생의 가장 화력 좋은 장작은 ‘책’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구본형 작가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을 이렇게 바꿔봅니다. 내게 책은 무엇을 위해 타오르고 있는가? 분명한 하나는 ‘성찰’입니다. 사춘기 무렵부터 앎과 삶에 대해 상식 수준의 철학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비교적 높은 정의감에 평균적인 연민과 안정적인 교양을 가졌다는 안도로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삼십대 중반에 들어서입니다. 바로 책을 진지하게 대면한 시점과 일치합니다. 책 속에는 내가 몰랐던 지식, 외면하고 싶었던 내면, 돌아보지 못했던 타인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찰의 첫 단계였던 진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였습니다. 지식의 비루함은 나를 흔들어 깨웠고 수치심에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강한 자존심과 인정욕구가 부른 참사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신중함이라고 자부했던 타인에 대한 반응이 날 선 경계심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인간관계가 부질없다는 허무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허나 지금까지 알던 내가 허상이었다는 사실에 좌절하기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폐허 속에서 일어서야 했습니다.

프랑켄슈타인과 도리언 그레이의 과오는 무엇이었는지, 데미안의 자각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노인이 바다에서 벌인 사투가 어떤 의미인지와 같은 것들에 나를 비추어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나 니체, 소로, 공자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귀를 기울여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나 유발 하라리, 칼 세이건의 저서를 통해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시선도 가져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넓어지는 만큼 ‘나’는 점점 작아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아는 척하려 하지 않고, 실수할까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에 비해 덜하다는 것이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건 아닙니다. 그래도 변명하려 애쓰지 않는 내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침묵의 진가를 알게 된 것 역시 드물게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타인이 아닌 자신을 경계하려다 보니 내 탓에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물론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조바심이 날 때도 있고,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순간 앞에서 번번이 좌절하지만 새로운 책을 마주하는 설렘은 변함이 없습니다.

책이라는 화로 위에 피어난 또 다른 불꽃은 ‘연대’입니다. 수많은 개인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우리는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갈등을 무리 없이 혹은 지혜롭게 봉합하는 것이 모든 공동체(사회)의 가장 큰 화두일 것입니다. 개인 각자가 노력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참 많으니까요. 혼자 읽기 어려워 참여했던 책모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책이 던져주는 무게감 있는 질문은 약간의 진지함을 기본 값으로 하기 때문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의미 없이 휘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림책, 청소년책, 고전소설, 벽돌책 등 다양한 책을 통해 어린이, 교사와 학부모, 여성 농업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들의 말과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성찰을 경험하고 있다고 느끼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존중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이들의 대화에서는 언성이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무의미한 개그도 타인을 향한 비난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책은 함께 모인 사람들의 이성과 공감을 끌어내주는 훌륭한 매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나 좋은 책을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을까요. 어린 시절 책 읽으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좀 더 귀담아들을 걸 그랬습니다. 한 편으로는 인생 한복판의 변곡점이 (겨우?) ‘책’이라니 어안이 벙벙하기도 합니다. 마치 파랑새를 찾아다닌 남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좋은 책을 통해 나와 타인과 우리를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해서 쉽게 지치지 않고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책 전달자로 걸어가려 합니다. 그 길에서 차곡차곡 이야기를 모아 나의 글로 독자를 만나는 상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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