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임자로서의 공무원, 노동자로서의 공무원
'공무원의 직업윤리와 노동권리', 그 너머의 이야기
대학 와서 의도치 않게 거의 끊다시피 했던 드라마를 요즘 꽤 즐겨보고 있다. 혼자 살게 되면서 찾아온 변화가 아닐까 싶다. 단, 즐겨보는 소재는 아직 제한적이다. 다들 당연스럽게 짐작할 만한 그런 쪽들만이다. 이쪽 분야부터 다 정복하고 나면 필요에 의해 관심 분야가 넓어지게 되지 않을까 싶긴 하다.
최근에 "비밀의 숲" 정주행을 끝냈다. 한참 화제가 되었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늦게서야 접하게 된 셈이다. 본편의 아성을 뛰어넘지 못한 속편이라는 평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사실 속편도 재미있었다. 물론 작품성과는 별개의 이유 때문일 수는 있겠다. 마침 검찰발 이슈가 쏟아져 나오는 요즘인 만큼 관련해서도 나중에 글 한 편쯤 쓸 기회가 있지 않을까.
잠깐 휴지기를 가졌다가, 이번에는 "미스 함무라비"의 정주행을 시작했다. '검경의 이야기를 봤으니 이번에는 판사의 이야기를!' 뭐 이런 거다. 원래 법조드라마 잘 안 봤는데 막상 보니깐 재미있어서 당분간 계속 찾아보게 될 것 같다. 국회 인턴을 시작한 후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한 내 진로 구상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미스 함무라비"는 그 유명한(최근에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의 '물의야기 법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던 문유석 판사님이 극본을 맡았던 작품이다. 이제야 막 정주행을 시작했기에, 아직 감상을 말할 수준까지는 못 된다.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드라마 자체의 감상 때문이라기보다는 문득 지나갔지만 괜히 여운이 남은 한 장면 때문이었다.
2화에서 참여관인 맹사성 계장은 의욕적으로 업무에 임하던 박차오름 판사에게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한 동료의 고통을 호소한다. 시정되지 않으면 법원 노조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계장의 경고에 박 판사는 "힘들어도 해야 될 일이면 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 공무원이잖아요."라는 말로 공무원 업무의 공익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계장 또한 이에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근데 그거 아십니까. 걔 싱글맘인 거. 퇴근할 때 법원 유치원에서 다섯살 된 애 데리고, 그러고 집에 가야합니다. 그래서 야근 안하려고 진짜 숨도 안 쉬고 일만 합니다." 이 논쟁은 분명 쉽게 끝날 수 있는 논쟁이 아니다.
그런데 이 논쟁이 나에게는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국회에서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체험'하고 있는 나로서 유사한 논쟁 또는 내적 갈등을 수도 없이 목격해오거나 느껴왔었기 때문이다.
노동 존중을 외치고, 노동법을 만드는 국회가 정작 소속 직원의 노동권은 하나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음은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다. 특히 약자의 의제에 힘을 쏟고 의정 활동이 활발한 의원일수록 소속 보좌진들은 밤낮없이 죽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더 이상 놀랍지 않다. 국정감사 기간이 되면 주 52시간은 커녕 야근과 밤샘이 당연하고, 코로나 사태가 악화되며 재택근무가 권장되는 상황에도 의원회관은 언제나 예외다. 밖에서 바라만 볼 때는 몰랐지만, 사실 국회의 많은 이들은 과도한 업무량에 매우 고생하고 있다.
그렇기에, 대체로 민주진보계열 초선 의원실의 분위기는 민주적이고 수평적이며, 보수계열 다선 의원실의 분위기는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역설적으로 당파성이 없는 보좌직원들에게는 보수계열 의원실에 대한 선호도가 훨씬 높다고 한다. 수평적이지만 언제나 많은 일을 함께 하려하는 부지런한 리더보다는, 위계적이지만 웬만한 일을 자기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게으른 보스가 더 낫다는 거다. 게다가 경력자의 말을 빌리자면, 보스 밑에서 있을 때 수고비 금일봉이나 각종 선물 등 직원들에게 떨어지는 콩고물들도 더 많다고 한다. 여러모로 웃픈 상황이다.
무엇이 정답일까. 나는 사실 국회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공무원이라면 모름지기 국민주권의 수임자로서의 책무를 다 하는 것이 다른 무슨 가치보다도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공익적 희생을 고용 안정과 보수 체계로 나름 보상해주고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일부 선생님들께서 교육자로서의 희생보다 앞서 노동자로서의 근무 시간 준수를 외치시던 모습이 온몸으로는 공감되지 않았던 이유도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을 거다.
공익적 마인드나 업무 관심도보다는 고용 안정과 노후 연금 등이 공무원직 선택의 주요 기준이 되어버린 지금의 사회구조에서 이런 논의는 이미 무의미해진 것일 수 있겠다. 애초에 관심 분야로의 진로 설계 중 일종의 '좋은 경험'으로 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나와 관심을 고려할 새 없이 필수불가결한 '생업'에 임하고 있는 누군가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부터가 무리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며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나조차도 이미 무의식에서는 엘리트주의적 사고에 젖어버린 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