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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석 Sep 18. 2022

소설가 류 씨와 나의 장바구니

무라카미 류 씨의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를 읽고 나서

"다들 휴가 어떻게 보내셨어요?" 그는  휴대전화 사진 앨범에서 제주 어딘가의 푸른 해변가와 무척이나 이국적인 자연의 풍경들을 번갈아 보여주며 모두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각자의 즐거웠던 휴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제주 외에도 국내의 다양한 지역에서, 안전하고 즐거운 휴가를 보내다 온 사람들이 꽤 되는 것 같았다.


휴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는 동네 근방이나, 미리 찾아둔 서울 근교 가볍게 외출할 만한 장소들을 방문해 볼 예정이라는 의견들이 다수였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이번 여름 휴가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는 밈처럼 쓰이는 표현인, '여름이었다...'를 덧붙일 수 있을 만한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나, 그 같은 호기로운 태도는 이내 금새 사그라들었다.


영화 몇 편을 시청하고, 정기구독으로 배송된 잡지 몇 권을 연달아 읽는다. 그리고는 간단하게 이른 저녁을 차려먹는다. 늦은 오후 시간대는 꽤 선선해서 땀이라도 뺄 요량으로 적당한 운동을 그저 내킬 만큼만 한다. 출근하지 않았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기까지는 별 다를 것 없는 일과다. 그러나 휴가를 이렇게만 보낼 수 없다. 그래서 쇼핑에 나서기로 마음먹는다. 8월 초라 이른 감은 있지만, 평소보다 조금 일찍 가을을 준비하기로 한다. 뭐 어떠냐는 마음 한편에는 허전함도 자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구매에 있어 되도록 합리적으로 판단하자고 마음먹고는 결국은 태도를 고쳐 느긋하게 쇼핑을 나선다.


꼭 필요한 외출 아닐 시에는 가능한 한 최소화 된 동선을 선호하는 기묘할 정도로 독특한 사람에게도, 여름의 5/3 정도 되는 지점부터는 가을 동안 입을 옷들을 미리미리 쇼핑해두는 습관이 있다. (이마저도 기묘해 보일 수 있지만 말이다) 양질의 옷을 미리 구비해두는 것은 트랜드에 민감한 패션 업계에 종사하지 않아도, 개츠비처럼 사교파티 같은 걸 빈도 높게 주최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불가필한 요소이며, 무엇보다도 경우에 따라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신뢰성 높은 든든한 선택지 그 자체가 되어준다.


그래서 조금은 일러 보여도 이런 종류의 일은 경우에 따라 상당히 중요해질 수 있다. 더군다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의 의류는 상의 팔 기장과 하의 총장에서도 상당한 변곡점을 맞이한다. 계절과 상황에 맞도록 단정하게 옷을 입는 것은 창의적 옷 입기와는 또 다른 노선의 일이다. 게다가 그런 마음에 더해, 이 쇼핑에서는 무엇보다도 만듦새 좋고 착용감 또한 훌륭해 입맛에 맞는, 그래서 고민 없이 자주 입을 법한 옷들만을 신중하고 느긋하게 구입하고 싶은 소비자로서의 욕심도 들어있다.


워드롭을 꾸려나갈 초기에는 접근성 좋고 자주 입는 튼튼한 치노 팬츠와 데님류를 먼저 구입했다. 그렇게 만듦새에 대한 안목이라는 것을 길러 차츰 유행을 타지 않는 기본의 기본 같은 외투들도 구입하게 되었다. 워드롭의 일부가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생각하는 요즘은 셔츠를 주로 구입한다. 어떤 기준에서, 그렇게 모은 셔츠들은 상당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구입해서 한 번도 입지 않은 셔츠는 없다.


결국 이번 휴가기간에도 나름대로 발품을 팔아 좋은 가격에 훌륭한 셔츠 두 벌을 구입했다. 편하고 가볍게 입기 위해 리바이스의 50년 대 웨스턴 셔츠 복각판(매력적인 체크 패턴과 튼튼한 만듦새가 돋보인다)을 구입했고, 버튼 다운 블루 옥스퍼드 셔츠는 이미 몇 장 있지만, 할인 폭도 높았고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인 셔츠 타입이기에 몇 개쯤 더 있어도 상관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짓먼 빈티지사의 제품을 구입했다. 두 벌의 셔츠는 모두 적합하게 몸에 맞았다. 가격 역시 적당했던 탓에 마음도 편했다.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잘 맞고 기본적으로 부담없이 입기 편했다. 게다가 각 셔츠 별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만듦새에 분명하게 배어 있다는 점 역시 구매에 있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부분이었다.


이 책의 저자 무라카미 류 씨도 쇼핑을 참 좋아한다. 특히, 셔츠 쇼핑을. 그러니 이런 책도 쓸 수 있었겠지 싶ㅇ을 정도로 말이다. 다만 그의 쇼핑 스케일은 좀 남다르다. 무려 페루자 FC가 세리에 A에서 경기하던 시절, 나카타 히데토시 선수를 만나러 간 이탈리아에서 브루넬로 쿠치넬리 같은 질 좋은 고가의 이태리제 의류와 맞춤 셔츠들에 푹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건 대부분 큰 고민 없이 족족 다 구입한다. 멋지지만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그 스스로도 중간에 한 번씩 자조적인 투로 스스로를 타이른다. 그렇지만 거기에서는 그가 쓴 소설 <368야드 파 4 제2타>나 <55세부터 헬로 라이프> 등에서 매우 세부적으로 묘사된 의복들이 어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토록 자세하게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일 수 있었는지 만큼은 명확해졌다. 그런 걸 알아가는 것도 이 에세이를 읽어내려가는 묘미 중 하나다.


그는 멋이란 건 일절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쇼핑의 즐거움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구입한다. 그리고 그것을 구입하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들을 기억해두었다가 언젠가 유쾌하게 적어낸다. 그리고 그걸 모아 만든 책으로 번 돈을, 다시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구입하는데 쓴다. 이런 건 어쩌면 일류 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다.


요즘은 질 좋은 고가 이태리제 맞춤 셔츠만큼 멋지고도 적당한 가격대를 형성하는 물건들이 온통 많아졌다. 약간의 시간과 애정 어린 집착을 보태서 잘 찾아본다면, 그런 것들이 이전보다 여러방면에서 구하기도 쉬워졌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정신 차리고 보면, 장바구니와 한숨만 느는 이유다. 물건의 질과 여러 합리적 조건들을 고민하기도 전에 이미 가성비를 중심으로 하는 마케팅 같은 것들의 틈바구니에서 사고가 마비된 적은 셀 수도 없다. 그런 걸 구매한 뒤 자극적인 야식을 먹었던 것만큼 후회한 적 역시 상당했다. 그렇게 쌓인 물건들이 꽤 되고 그런 걸 덜 겪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핑에는 배제할 수 없는 특유의 본질들이 있다. 대게 만족감과 즐거움 같은 것들로 대표된다. 그런 것들에 대해 무라카미 류 씨는 '그저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서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쇼핑이 기분을 좋게 해주는 이유는 '갖고 싶은 것을 고르고 사는 행위가 자본주의적 자유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충실한 시간을 갖고 있으면 다른 일은 귀찮아지니' 조금은 강력한 자력을 가진 '그것'으로부터 약간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에세이를 마친다.


대체적으로 무난했던 이번 여름휴가 기간 동안 벌인, 크지도 적지도 않은 쇼핑과 소비 행위에 대한 나름의 이야기를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역시, '여름이었다...' 싶을 이야기는 못 될 성싶다. 그러나 어쩌면 누군가의 혹시 모를 쇼핑에도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할지 모를 일이니 일단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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