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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석 Aug 25. 2021

우리는 그렇게 나이테를 만들어 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태풍이 지나가고>를 읽고 나서

"희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다. 단지, 희망은 수가 적고 대부분 추상적이지만 시련은 지긋지긋할 만큼 많고 대부분 구체적이다. 그것도 내가 내 돈 들여가며 배운 것 중 하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 <1Q84> 중-


대체로 그렇다. 그래서 읽는 동안 연신 고개를 끄덕였던 문장이다. 명쾌한 문장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도 좋은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포볼을 노리는 타자만큼 노련한 작가만 가질  있는 이야기에 대한 선구안과 통찰 같은 것들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태풍이 지나가고> 역시 그런 면에서 매우 훌륭한 만듦새의 영화라고   있다. 또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가 지닌 힘의 정도를 아는 것과 그로부터의 적당한 거리감을 잡아내는  모두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  특히 두드러지는 점들인데, 그런 지점들로부터 사실감을 체감하고, 나아가 몰입을  공감부터 이해까지 자아낼  있었다고 생각한다. <태풍이 지나가고> 역시 그의 그런 장점들이 돋보였던 영화  하나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가족 이야기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시노다 료타라는 중년 남성의 실패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시노다 료타는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내다. 그는 표류하는 부표만큼이나 위태롭다. 거기에 더해, 소설가지만 등단작 이후 어떤 것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 여러모로 건실하지도 못하다. 게다가 은근 뻔뻔한 면도 있다. 첩첩산중이다. 아버지처럼 만큼은 살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자신도 아들에게 닮고 싶지 않은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없고, 그런 것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여버렸는지 이제는   조차 없다.  모든 것들따지고 보면 선택에 따른 결과였고, 결국 최악을 면하기 한차악뿐인 정도에까지 .


 중년 남성의 실패담으로서 <태풍이 지나가고> 정말이지  없이 짠하고  무척이나 두려운 이야기이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금전 상황과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곤란의 틈바구니에서  좋지 못한 위치에 놓인 위기의 중년이라니. 그런  영원히 원활해지지 않을 정체 속에 갇힌 것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이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일어날  있을 법한 일이기도 다.더욱이 이렇다  뾰족한 해결책도 는 일이.


끝내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언젠가 시노다 료타처럼 정말 막다른 골목에 몰렸거나 몰리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노다 료타의 어머니(키키 키린 분)는 자신의 아들에게 묻는다. '왜 지금을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분명 쉽게 대답할  있는 질문은 아니다.   나은 무언가에 대한 욕심과 미련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그것들은 대체로,  나름의 어쩔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방법은 틀렸지만 시노다 료타의 경우도 그랬다. 그러나 그가 실패했고, 실패에게는 시노다 료타와 그의 와해된 가족들의 이야기가 생겼다. 그렇게 겪었던 이야기가 각자의  위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건 앞으로도 또다시 그럴 것이다.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때때로 성공담보다 잘 읽히는 실패담이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한 없이 짠한 중년과 그의 실패를 내세우면서도, 묘하게도 공감과 납득을 자아낸다. 모순적이지만, 성공한 실패담에는 삶을 관통하는 보다 명확한 지점이 존재한다. 그런 건 대체로 상당한 통찰을 요구하며, 건조하지 않도록 적당한 유쾌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 이 경우도 그랬다. 시노다 료타의 삶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조바심 같은 것들로 차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은 인정해야 하는 것들을 마주하고 나면, 그저 겪고 나아가라는 말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사람 사는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그래서 현실적이고 명확하며 또, 단순하고도 담백하다. 에둘러 만들어진 행복과는 확실히 다르다.


어느 나이에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개인에 대하여, 그것은 어쩌면 잊어버리거나 놓칠 만큼 이미 당연한 사실이 되어 어쩌면 이제는 덜 중요해져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런 것들을 환기시켰다는 점만으로도 매우 인상 깊었다. 그것이 <태풍이 지나가고>가 만듦새 좋고 훌륭한 영화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이유다.


이 작품만큼은 좀 더 물질적인 방법으로 소장해두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런 생각에는 약간의 자조적 의의도 있었다. 그래서 영화 포스터나 굿즈 같은 것들도 찾아보았지만, 결국 <태풍이 지나가고>를 각색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쥐고 있기로 했고, 그건 좀처럼 가벼이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더 오래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중고서점에서 누군가 되팔고 간 책으로 구입한 건, 왠지 그러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영화가 남긴 여운 중에는 약간의 낭만 같은 것도 있었는데, 그 탓이겠거니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혹시나 싶어

독서 중 인상 깊었던 문장과 여러 생각에 도움이 되었던 콘텐츠 몇 가지를 함께 공유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태풍이 지나가고' 속 인상 깊은 문장들



"이 포스트잇이 료타의 희망이었다. 이것들이 모두 뒤섞여서 거대하게 부풀어 올라 큰 이야기를 뽑아내기

  시작할 때, 거기에 리얼리티가 깃드는 것이다. 사실이 자아내는 이야기는 반드시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머리로만 상상한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괴물 놀이와 다르지 않다" (p.75)   


""이제 가족이랑 만나는 건 그만둬.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져야 다 큰 남자라는 거다. 알겠어?" 료타

   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수첩에 '누군가의 과거가 될 수 있는 용기'라고 적어 두자고 속

   으로 생각했다." (p.124) 


""복권은 도박이 아니지." "도박이야" "바보구먼, 달라." 라며 료타는 정색을 하고 말한다."그럼 뭐라고 불러?" "꿈이지. 삼백 엔으로 꿈을 사는 거야."" (p.130)


""아버지 있잖아,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걸까?"라고 료타가 물었다." "뭘?" "자기... 인생을 말이야." "글쎄, 마지막까지 통 모르겠더라."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아버지는 '스크래치'라는 즉석 복권을 했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p.178)


""아버지도 생각했던 대로 안 됐던 거겠지, 여러 가지로, 시대를 잘못 만나서...... "아니, 시대 탓을 했을 뿐이야, 자기가 글러 먹은 것." 료타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p.179)


""행복이라는 건 말이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거야." 어머니의 말에 료타는 눈을 들었다. 슬픈 말이지만 정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등려군의 노랫소리가 거실을 채운다. (p.180)






함께 도움이 되었던 콘텐츠들



패닉 1집 Sea Within Album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이적 5집 고독의 의미 Album <20년이 지난 뒤>


주 1). 글을 쓰는 과정에서 패닉과 이적의 두 곡을 자주반복해서 들었다. 패닉의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과 성찰을 담은 곡이고, 이적의 <20년이 지난 뒤>는 20년이 지난 뒤에 자신의 어떤 모습을 궁금해하는 곡이다.


패닉에서의 젊은 이적과 시간이 흐른 뒤의 이적에게는 삶의 많은 변곡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이적은 그런 부분에서 매우 솔직하고, 꽤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곡들에 반영해왔으며, 또 반영해 나가고 있는 가수이다. 여러모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수의 디스코그래피를 통해 그의 삶의 궤적이 솔직하게 드러나고 뚜렷하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충분히 상징적인 가수라고 생각한다. 또 그런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 역시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다. 더불어 <태풍이 지나가고>의 원래 사운드 트랙으로 활용된 하나레 구미의 <심호흡>과도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이니 관심 있으신 분께서는 한 번쯤 각 곡들과 앨범을 들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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