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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수파 Dec 22. 2019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수상한 그녀> 2014


<수상한 그녀>는 시작되자마자 이 영화를 계속 볼 것인지 말 것인지 필자로 하여금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흘러나오는 이 나레이션 때문이었다.

여자를 공에 비유하면, 꽃 같은 10대는 농구공이라 할 수 있다. 높이 떠 있는 공을 잡기 위해 남자들이 온 힘을 다해 손을 뻗는다. 20대 여자는 럭비공이다. 남자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공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남자가 공에 목숨을 거는 유일한 시기다. 30대는 탁구공이다. 공 하나에 달려드는 남자의 수는 팍 줄어들지만, 공에 대한 집중력은 아직 괜찮은 편이다. 중년의 여자는 골프공이다. 공 하나에, 남자 하나. 남자는 그 공만 보면 아주 멀리 날려버린다. 그리고 여자가 그 나이마저 지나고 나면,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피구공 신세다.

처음부터 여성의 가치를 신체적 나이와 남자에게 받는 구애의 수로 평가하는 이 나레이션을 들으며, 나는 이 영화에 많은걸 기대해선 안된다는 걸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상한 그녀>에는 내내 이상한 지점이 있는데, 극중 여성캐릭터들과 주인공 '오말순(나문희)'의 관계가 모두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대상화(여성혐오)의 극치인 나레이션이 끝나자마자 말순은 남자 때문에 '옥자(박혜진)'와 머리채를 잡고 싸우며, 말순과 과거에 원한이 있는 여성은 말순의 일터에 찾아와 쑥대밭으로 만든다. 또 말순은 직업이 무엇인지 대신 '시집 못 간 노처녀'로만 설명되는 박씨의 딸 '박나영(김현숙)'과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지하철에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에게 자의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모유수유를 할 수 없었단 이야기에도 잔소리를 퍼붓는다. 함께 살고 있는 며느리 '애자(황정민)'에겐 '돈 벌어다 주는 남편이 있는데 뭐가 힘드냐'며 음식부터 자녀교육까지 사사건건 간섭하고 타박하던 말순은 그녀가 결국 홧병으로 쓰러져버리자 요양원으로 보내질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손주들 중 오직 '반하나(김슬기)'만이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낼 것을 강력 주장한다.


반대로 남성캐릭터들은 말순에게 하나같이 우호적이다. 손자 '반지하(진영)'는 헤비메탈을 하는 대학생임에도 할머니에게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자고 조르고, 한때 말순의 종(!)이었던 박씨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말순의 충실한 집사 역할을 수행하며, 방송국 PD '한승우(이진욱)'는 별 대단하지도 않은 말순의 노래에 반해 가수로 성공시키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식이다. 결정적으로 이 남자들 모두 말순에게 반해 열렬한 구애를 펼친다. 그러나 그들이 말순에게 펼치는 애정과, 여성들이 말순에게 내비치는 적대는 너무 극과 극이라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렇게 이 영화엔 여성들은 서로 이성을 두고 경쟁해야하는 적일 뿐이며, 고로 말순이 의지해야 하는 건 남자 뿐이라는 '여적여' 구도가 이야기 전반에 깔려있다. 어쩌면 그 비밀은 '현철(성동일)'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순의 친자식으로서, 노인 문제 교수로서 이 사건을 가장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요양원 여부를 두고 싸우는 자식들의 논쟁에서 발을 뺀 채 '착한 아들' 역만 맡으려 하니 말이다.



물론 <수상한 그녀>에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 지하의 곡과 할머니 말순의 목소리가 만난 음악은 젊은층과 노년층의 화합을, 꿈과 사랑을 뒤늦게나마 이루는 말순의 모습에선 자식들을 위해 많은 걸 포기하고 희생해야했던 부모 세대에 대한 헌사의 메세지가 담겨져 있으니 말이다. ‘40년생 오말순’이 완벽하게 패치된 연기로 티켓값이 아깝지 않게 하는 ‘심은경’의 퍼포먼스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가족과 사회에서 소외되어가는 노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영화다보니, 젊은 남녀들을 볼 때마다 결혼을 종용하는 말순의 모습처럼 구세대적인 가치관과 대사가 몰입을 수시로 방해한다. 그 중에서도 말순의 가출로 그녀의 소중함을 느낀 아들과 며느리가 그녀를 계속 모시고 살기로 결정하는 결말은 많은 노인들의 바램을 반영한 것일테다. 그러나 말순은 반성이나 변화 없이 그대로 며느리를 대하고, 며느리 쪽에서 그나마 말순에게 맞받아칠 수 있는 정도로 변화한게 과연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겨우 5년 전 영화임에도 사회적 인식의 큰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게 어쩌면 이 영화의 의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수상한 그녀>는 그때는 웃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웃을 수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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