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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수파 Oct 30. 2019

문 앞을 서성이는 모든 겁쟁이들에게

<잉글랜드 이즈 마인> 2017


시를 노래하는 남자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마치 음악가의 탈을 쓴 문학가의 일대기 같다. 영화가 왜 이런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가는 주인공 '스티븐(잭 로던)'의 방에 발을 들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곳엔 밴드의 포스터 대신 오스카 와일드의 초상화가 붙어있으며, 기타는 온데간데없고 타자기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 한켠에 꽂힌 몇 개의 레코드들만이 정성스럽게 진열된 책들과 맞서, 주인공이 음악가임을 간신히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레코드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방을 보자마자 문인이 아닌 음악인의 공간이라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과연 세무사라는 반복적인 일과에 몸을 맡긴 채 머릿속으론 공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의 모습은 '프란츠 카프카'와 많이 닮아있는데, 그래서 그의 친구가 되려면 음악은 몰라도 책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문인들의 말을 인용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린더'만이 그의 마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권한을 얻아낸다. 하고픈 이야기를 말보단 글로 옮겨내는데 익숙한 그는 기어이 음악도 딱 한번, 그것도 감질맛 날 정도로만 관객에게 들려준다. 결국 노래 가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밥 딜런처럼, 스티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는 '음유시인'이 아니었을까. (극 중 면접관에게 노벨문학상을 언급하는 스티븐의 모습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개구리의 우물, 새의 알, 스티븐의 방


이 음악가의 음악가답지 않은 면모는 이뿐만이 아닌데, 밴드 멤버를 모집해놓고 막상 보자마자 달아나버릴 정도로 소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점이다. 흔히 밴드의 리드보컬 하면 떠올리기 어려운 성격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영화는 1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 전체가 그가 자신의 방에서 나와 세상의 문을 두드리기까지의 망설임과 내적 갈등만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만 보면 그가 마침내 어떤 모습으로 부화했는지 끝내 알 수 없다. 그저 그가 '더 스미스의 스티븐 모리세이'가 되기까지 수천번의 망설임이 있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재미있는 지점은 이런 전개가 여타의 스타 성장기나 밴드 창립 기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신선하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스미스의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어도, 스티븐 모리세이가 누구인지 몰라도 이 영화를 즐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주변 사람들은 꿈이 있음에도 도전하지 않는 스티븐을 답답해한다. 하지만 사실 가장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스티븐 본인이다. 마음은 이렇게나 간절한데, 왜 내 몸은 도통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스티븐에게 꿈이란 모두에게 무시당해도 꿋꿋이 자신을 믿고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티븐은 죽음보다도 두려운 것이다. 꿈이 실패하게 되는 상황이, 자신의 그릇이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말이다. 그래서 지독할 정도로 겁이 많은 스티븐은 나를 거절하고 상처 줄 가능성이 있는 타인보다는 언제나 안전한 외로움을 택한다. 그럼에도 매력과 재능을 갖고 있었던 덕에, 타인 쪽에서 그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오는 행운을 얻어낸다. 그들 중 대부분이 여성인데, 이는 적어도 영화 안에선 스티븐을 연기한 배우 '잭 로던'의 프리패스 얼굴을 보면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그러나 타인은 먼저 다가와줄 수 있어도, 세상이 먼저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티븐의 방문 앞에서 나오라고, 같이 가자고 소리치다 결국엔 지쳐 떠나버린다. 그렇게 친구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보면서도, 스티븐은 언제나 그래왔듯 방에서 시간을 죽인다. 누군가 자신을 문 밖으로 끄집어내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러던 어느 날, 옛 친구 '앤지'가 암에 걸려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영영 찾아오지 않으며, 결국 자신이 바뀌는 길 뿐이라는 것을. 그것은 이제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인생이 그에게 전하는 마지막 경고장이었다.



문 앞을 서성이는 모든 겁쟁이들에게


마지막 기회 앞에서 스티븐은 여전히 망설이고 울먹이며 엄마에게 말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 이 세상에 맞는 것 같지 않아요." 난 이 장면을 보며 <라라랜드>의 한 대사를 떠올렸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난 정말 죽는다'며 마지막 오디션 기회를 거절하는 여주인공에게 남자주인공이 던진 말. "넌 어린애야."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도전할 용기도, 하기 싫은 일을 해내는 인내심도 없으면서 세상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는 스티븐 역시 어린 아이다(그래서 그는 '어른이 되면 연락하라' 했던 앤지에게 끝내 연락하지 못했다). 결국 그가 어른이 되기 위해선 선택해야만 한다. 꿈을 이룰 용기가 없음을 인정하고 현실에 자신을 끼워맞추던지, 엄마의 말처럼 실패의 두려움을 딛고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던지.


자신을 바꾼다는 것, 즉 자기혁명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으며,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그 고통을 지독하리만치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거침없이 꿈을 향해 도전하고 용기를 내는 주인공들을 보며 느껴야 했던, '왜 난 저렇게 하지 못할까'하는 자괴감을 안기지 않는다. 대신 완전한 공감이라는 위로를 선사한다. 그리하여 스티븐은 안온한 감옥이었던 방을 파괴한 뒤, 꿈을 향한 마지막 기차에 올라타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이때 문 너머 스티븐의 얼굴은 유리창 때문에 누구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잘 비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곧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티븐에겐 결국 문이 열렸음을 알지만 우리 자신은 어떨지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는 기꺼이 문을 두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 받을 99%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단 1%의 가능성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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