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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수파 Oct 30. 2019

재능없는 자의 슬픔

<나의 작은 시인에게> 2018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치원 교사 '리사(매기 질렌할)'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강한 지적 욕망과 예술적 야심을 가진 그녀에게 자상한 남편은 어딘가 심심하고, 또래 문화에만 빠져있는 자식들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것을 채우기 위해 배를 타고 건너편 섬에서 시를 공부하던 어느날, '지미(파커 세바크)'라는 원생이 천재 시인임을 알게 되는 리사. 그러나 지미의 주변인들은 그의 재능에 별로 관심이 없고, 클럽을 운영하는 그의 아버지는 예술보단 물질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지미의 시가 빛을 보긴 커녕 묻히고 말리라 생각한 리사는 자신이 직접 그 재능을 지켜주기로 결심한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빛나는 어린 천재보다, 재능없는 자의 그늘을 비추는데 더 관심이 많은 영화다. 리사는 평범한 삶보다 비범한 삶을 원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재능은 이를 가능케하기엔 한참 모자라다. 마치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미 정도의 시를 쓸 수는 없는 것처럼…. 한마디로 꿈은 피카소인데 현실은 유치원생 실력인 것이다. 그래서 리사는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평범한 자식들은 외면하고,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을 가진 지미에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이리라.



결국 리사가 시 수업 시간에 지미의 시를 읊으면서, 이야기의 노선은 리사의 재능 훔치기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급기야 매력적인 시 선생님의 구애를 받기에 이르는 리사. 재능이 안겨주는 삶은 이렇게나 달콤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리사는 이 달콤한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진짜 시의 주인인 지미를 무대에 세운다. 그러자 리사에게 찬탄의 말을 쏟아냈던 시 선생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비난의 말을 퍼붓는다. 세상이 재능없는 자에게 얼마나 냉혹한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미 역시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리사에게 빈말이라도 달콤한 말을 해주는 법이 없다. 결국 지미가 시를 바친 이가 리사가 아닌 다른 유치원 선생님이라는 얘기를 듣자, 리사는 자리에서 뛰쳐나와 울음을 터뜨린다. 아, 어쩌면 그녀가 진정 원했던 건 재능이 아닌 그 재능으로 사람들에게 받는 관심과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리사는 눈물을 닦고 지미의 재능을 전적으로 후원한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그가 선생님이 천직인 사람같다고 느꼈다. 사실 이는 리사를 마냥 미친년이 아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간으로 그리기 위한 영화의 선택이기도 하다. 되고 싶은 나와 거울 속의 나, 살고 싶은 삶과 살아내야 하는 삶, 갖고 싶은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의 괴리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리사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아기 돌보미인 '베카(로사 살라자르)'의 등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리사는 지미의 재능을 지켜보고 도와주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만다. 내가 저 재능을 가졌다면 저렇게 낭비하진 않았을텐데. 나라면 다르게 살았을텐데. 리사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테다. 그러나 그 재능은 지미의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도 엄연히 지미의 몫이다. 그래서 지미는 리사의 새장 속에서 가볍게 벗어난다. 리사가 아무리 재능을 손에 넣으려 해도 넣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만약 리사가 진작 지미를 포기했더라면, 평범한 삶의 가치를 발견했더라면 어땠을까. 사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지 않던가. 그러나 리사는 다른 삶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걸 잃어버린다. 결국 재능없는 자의 비애를 그린 이 영화는 현실과 이상에서 착륙 지점을 찾아낸 <프란시스 하>보다, 그 안에서 계속 부유하던 <프랭크>와 더 닮아있다. 심지어 <프랭크>에도 매기 질렌할이 출연하기까지 하는데, 그 점에서 <프랭크>의 여자 버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묘하게 우울하고 어둡지만, 동시에 현실적이고 날카워서 잔상이 오래 남는 영화다. 리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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