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권하는 사회>를 읽고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이 영상을 보여주었다. 지하철에서 어떤 이가 노래를 크게 틀어 승객 중 한 명이 그 모습을 나무라는 데 그것을 무시해 버리는 영상이었다. 조회수는 높았고, '눈이 돌아가 있네.''저런 사람은 잘못하면 칼부림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등 여러 댓글이 달렸다.
우리는 종종 수치심과 죄책감을 혼동하여 죄책감만 심어줄 일에 수치심을 주기 일쑤다. <수치심 권하는 사회>라는 책에는 그 두 가지 용어를 명확히 구분해 준다. 죄책감은 행동의 문제만을 언급한다. 상대가 '나는 나쁜 짓을 했다' 라고만 느끼게 한다. 반면 수치심은 '나는 나쁜 사람이다' 라고 느끼게 한다. 이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저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죄책감'을 느낄 때 행동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아랫글은 해리엇 러너의 책을 응용하여 든 예시다.
어떤 '론'이라는 남성이 자기 아내를 폭행해 법정에서 심리치료 명령을 받았다. 그 남자는 '학대자 집단'에 들어가는 것은 거부했지만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는 남자 집단'에 들어가는 것은 거부하지 않았고 심지어 관심까지 보였다. 이에 대해 해리엇 러너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론은 '아내를 학대한 사람'보다 나은 존재로 대우받을 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후회할 가능성이 더 크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똑바로 보고 진심으로 책임감을 느끼려면 자아존중감이 있어야 한다"
(수치심 권하는 사회 중에서)
우리 사회는 죄를 지으면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내가 본 영상은 해당 사람들의 얼굴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물론 그 영상을 찍은 사람의 의도는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선한 의도로 했을 확률이 높다. 지하철에서 이런 행동을 하면 전 국민으로부터 망신을 당할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로 활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지하철에서 소리를 크게 해 영상을 본 사람의 벌 치고는 너무 무겁지 않은가. 이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지적을 받았고,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후에 개선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모자이크 없는 영상과 조회수, 댓글은 그에게 수치심을 주는 행위였다. 그 수치심은 분노를 나을 수 있다.
'수치심과 비난의 문화에서는 분노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치심 권하는 사회 267쪽 발췌>
지금 우리나라는 분노의 사회다. 층간소음이 살인 사건이 되고, 사회에 대한 분노로 '묻지 마 칼부림'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다. 개개인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려면 '죄'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죄'로만 보면 좋겠다.